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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글씨에 담긴 조선 유학자의 초상 - 윤성훈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조여일 | 기사입력 2026/05/27 [17:56]

단정한 글씨에 담긴 조선 유학자의 초상 - 윤성훈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조여일 | 입력 : 2026/05/27 [17:56]

단정한 글씨에 담긴 조선 유학자의 초상 

- 퇴계 이황이 손자에게 써서 준 두 권의 시첩(詩帖)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란 책이 있다. 1798년에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편찬된 서적으로서, 영남 지역 인물 860여 명의 생애와 행적을 묘지명이나 행장(行狀) 등 각종 자료에서 가려 뽑아 출신 군현(郡縣) 별로 편집한 문헌이다. 정조는 같은 해 이미 비슷한 성격의 『인물고(人物考)』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중국의 고사 인물에 대해 해박한 관료들이 정작 우리나라 역대 인물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현실에 문제를 느낀 정조가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을 동원하여 각종 자료에서 초출(抄出)하여 일종의 ‘우리나라 역대 인물 전기’를 편찬한 것이다. 『영남인물고』에도 비슷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영남 지역에서 모아 올린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채제공(蔡濟恭)이 전체 작업을 주관하고 젊은 문신(文臣)들이 분담하여 자료를 등사, 발췌, 요약, 수정하게 하였다. 참여한 편수관은 모두 25명이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작업하여 1798년 10~11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편찬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간행에 이르지 못하고 사본(寫本)으로만 전하고 있지만, 『영남인물고』는 정조대의 문화적 역량과 당대의 정치 현실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퇴계 이황 조(條)는 이 책 권5 ‘예안(禮安)’ 편에 수록되어 있다. ‘이황(李滉) 문순공(文純公)’ 이란 제목 하에 자호(字號)와 생몰년, 문과 급제, 관직 및 증직, 문묘(文廟) 및 도산서원 배향 사실 등 생애 이력을 아주 간단히 서술한 후, 퇴계가 자찬(自撰)한 묘갈명을 인용하였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生而大癡 壯而多疾)”로 시작하여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乘化歸盡 復何求兮)”로 끝나는 소박하고도 겸손한 96자의 짧은 묘갈명 전문을 그대로 옮겨 실었으며, 다른 기록의 인용은 일체 없다. 기타 언행이나 일화의 기록도 전혀 없다. 묘갈명의 인용 후 곧바로 이런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개괄하여 논하건대, 공자와 맹자 이후 수천수백 년 동안 그 도통을 얻은 이는 중국에는 오직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뿐이고, 우리나라에는 오직 퇴계뿐이다.”
(槪論之, 孔孟以後數千百載之下, 得其統者, 在中國而惟程朱, 在東國而惟退溪而已)

▲한국고전총간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권5 퇴계 이황 조(條)
 
  영남에 퇴계란 인물이 있음을 그 누가 모르겠으며, 이황에게 훌륭한 행적이 무수히 있음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간략하기 그지없는 『영남인물고』 퇴계 이황 조는 거꾸로 이 사람의 위대함을, 그리고 당대인 특히 남인(南人)들이 그를 얼마나 추앙하고 있었는지를 잘 웅변하고 있다. 여러 자료로부터 발췌한 여러 언행을 모아 기록하여 분량이 많아진 경우도 허다했던 인물 전기의 숲속에서, 장식 없이 간명한 퇴계 이황 조는 오히려 우뚝하다. 이는 전기 기록이라기보다 차라리 문장으로 체화한 존경의 염이다. 퇴계 이황 조의 끝에는 작은 글씨로 “채제공 외람되이 기록하다”(蔡濟恭僭記)라는 5글자가 부기되어 있어서, 이 조가 편찬 총재관 채제공이 스스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영남의 수다한 인물의 전기를 모아 편찬한 『영남인물고』라는 큰 책 안에서 이 간략한 조목은 여러모로 눈에 띈다.
 
  정조 치세라는 좁은 시대와 남인이라는 일개 당색을 넘어, 조선시대 전체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차지하는 위상은 거대하다. 사회와 통치 시스템, 그리고 사상과 도덕과 행동 강령에 이르기까지, 유학 특히 주자학은 조선시대의 국가 운영과 개인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념이었다. 건국 초의 어수선했던 시기를 지나고 중기로 접어들며, 조선의 지식 사회는 주자의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함을 점차 강하게 인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대의 수많은 촉망받는 젊은 학자들이 이 거대한 주제에 달려들었다.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치세를 거치며, 소위 ‘사화(士禍)’로 불린 수차례의 혹독한 정치적 좌절도 이 도도한 흐름을 막지 못했다. 이 시대적 과제에 답한 많은 학자 가운데 퇴계는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퇴계의 사상적 성취는 동아시아 성리학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우뚝하여서, 위의 『영남인물고』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후대에 그의 이름은 정자, 주자와 비견되는 거룩함의 영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퇴계의 위대함은, 물론 주자의 학문에 대한 그의 도저한 연찬이라는 그 누구와도 비견하기 힘든 그의 학자적 소양에 근거한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또한 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퇴계 사상의 높이가 우뚝하면 우뚝할수록, 그것이 배태된 시대적 토양을 깊이 파헤쳐 볼 필요가 크다. 가까이는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멀리는 조선 초부터 숱하게 제작ㆍ논의되었던 〈천명도(天命圖)〉 없이, 그리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학문적 토론 없이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과 『성학십도』는 탄생할 수 없었다. 위대한 사상가 퇴계 또한 시대의 아들이었다.
 
  옛사람들은 종종 누군가의 글씨를 마치 그 사람을 직접 대하듯 여기곤 했다. 동국(東國) 도통(道統)의 계승자이자 사문(斯文)의 담지자라는 퇴계의 위상에 힘입어, 퇴계의 글씨 또한 후대에 귀히 여겨졌다. 전해 들은 위명은 실제 마주한 인간상과 부합할 때 더욱 진실되게 다가온다. 기대승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면 퇴계의 겸손한 인격과 학문에 대한 철저한 태도에 감화되는 것처럼, 그의 글씨를 실제 보면 도학자다운 단정함과 온화한 인품의 체화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퇴계 글씨의 어떤 형태적 요소가 그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 이 글에서는 이황이 남긴 글씨 가운데 두 가지 예를 직접 살펴보며 이를 알아보고자 한다. 글씨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퇴계 이황 글씨의 이러한 형태적 특성을 가능케 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즉, 그는 전대(前代)의 어떤 글씨를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썼는가?
 
  철저한 주자학 연구자이자 도학의 실천자답게 퇴계는 글씨 서사(書寫) 또한 주희의 교조에 따랐다.
 
선생은 글씨를 쓰고 시를 지을 때 한결같이 회암(晦菴)이 이미 정한 규칙을 따랐으므로, 아득히 높아 옛것에 가까워 세상 사람들이 미칠 수 없었다. 비록 우연히 한 글자를 쓰더라도 획을 정돈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리하여 자체(字體)가 방정하고 단정ㆍ중후하였다. 비록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읊더라도 한 구절 한 글자마다 매번 골똘히 생각하여 고쳐 정하며 남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진 않았지만 또한 한 마디도 비슷하게 시어(詩語)를 둘 수 없었다.
先生寫字作詩, 一遵晦菴已定之規, 故高絶近古, 世莫能及. 雖偶書一字, 莫不整頓其畫, 故字體方正端重. 雖偶吟一絶, 一句一字, 必靜思更定, 不輕示人, 人不難知, 而又不能措一辭於髣髴也.
     (이덕홍(李德弘) 『간재집(艮齋集)』 권5 『溪山記善錄』 上 記退陶先生言行중에서)
 
  제자인 이덕홍이 기록한 퇴계의 행적 중 글씨 쓰기에 관한 언급이다. 퇴계의 글씨가 정돈되어 방정하고 단정하고 중후하였는데, 이는 주희의 글씨 쓰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주희의 어떤 방법을 따랐던 것인가? 이에 대해 이황이 제자인 돈서 김부륜(金富倫)에게 한 말이 있다. (‘돈서’는 김부륜의 자)
 
명도(明道, 程顥)는 글씨를 쓸 때 매우 경(敬)하게 하였고, 원래 잘 쓰려고 하지 않았으나 또한 잘 쓰지 않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다만 글씨를 씀에 경(敬)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씀은 쓰는 사람의 타고난 재주와 공력에 따라 저절로 성취가 있게 될 뿐입니다. 이는 곧 『맹자』의 “반드시 일을 행하되 기필하지 말 것이며, 마음속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이 일로 나타난 것이니, 성현의 심법이 이와 같으며 꼭 글씨를 쓰는 것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도 이르길, “그 가운데 전일(專一)함을 두어야 한다. 모든 점과 획은, 마음을 놓아버리면 거칠게 되고, 예쁘게 쓰려 하면 미혹된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른바 ‘전일함’이 곧 경(敬)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배우는 사람이 꼭 글씨를 잘 쓰도록 하고자 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는 것은 정자(程子, 明道)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부러 잘 쓰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는데, 이는 정자의 뜻과 더욱 거리가 멉니다.
明道寫字時甚敬, 固非要字好, 亦非要字不好, 但敬於寫字而已. 字之工拙, 隨其才分工力, 而自有所就耳. 此卽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之見於事者, 乃聖賢心法如此, 不獨寫字爲然也. 故朱子亦曰: “一在其中. 點點畫畫, 放意則荒, 取姸則惑.” 所謂一卽敬也. 來喩謂‘欲使學者, 不必工於書藝’, 此非程子之意, 而又云‘故爲不好’, 其去程子之意益遠矣.
      (이황, 『퇴계집(退溪集)』 권28 김 돈서에게 답함[答金惇敍] 중에서)

 

  정자, 즉 명도 정호도 주자도 모두 한결같이 글씨 쓰기에서 강조한 것이 ‘경(敬)’이다. 경 즉 주일무적(主一無適)이야말로 유자(儒者)의 글씨 쓰기의 알파요 오메가다. 경이 중요한 것이지,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하지 않다. 잘 쓰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 없이, 그렇다고 굳이 잘 쓰지 않으려 할 것도 없이, 전일하게 그리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쓰다 보면 저절로 유자의 좋은 글씨가 된다.


  그러나 정자와 주자라는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 퇴계의 이러한 발언은, 이념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 글씨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퇴계는 그 글씨 쓰기의 실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글씨를 추구했는가? 이에 대해서도 그의 발언과 실천 양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문집에서 우리는 퇴계가 ‘추구하지 않고자 한 바’를 확인할 수 있다. 

 

字法從來心法餘 자법이란 원래 심법의 표현이라
習書非是要名書 글씨 익힘이 명필로 이름나길 바라는 건 아니라네
蒼羲制作自神妙 창힐과 복희가 만든 글씨 절로 신묘하니
魏晉風流寧放疎 위진의 풍류라고 어찌 방종하고 소홀하랴
學步吳興憂失故 오흥의 걸음 배우려다가 이전 것도 잃어버리고
效顰東海恐成虛 동해를 본뜨다가 허사 될까 두려워라
但令點畫皆存一 다만 점과 획마다 모두 마음이 전일해야 하니
不係人間浪毁譽 세상의 헛된 비난과 칭송은 관여될 게 없도다
       (『퇴계집』 권3, 정자중의 〈한거(閒居)〉 20수에 화답하다중에서)
 
  정 자중(鄭子中), 즉 정유일(鄭惟一)에게 준 20수의 시 가운데 〈글씨를 익히다[習書]〉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연인 경련(頸聯)에서 ‘오흥(吳興)’과 ‘동해(東海)’를 배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흥’은 현재의 쑤저우(蘇州)로서 그곳 출신이었던 조맹부(趙孟頫)를 가리키고, ‘동해’는 명나라 초의 명필이었던 장필(張弼)의 호이다. 송나라 황족 출신으로 원나라 시기에 활동했던 조맹부의 글씨는 조선 초를 풍미했다. 조맹부의 글씨는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라 불리는데, 우아하고 미려한 서풍이 특징이다. 장필은 활달하고 분방한 초서로 유명하다. 장필의 광초(狂草)는 특히 조선 중기 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초서의 대가로 유명한 황기로나 양사언의 글씨에서 장필 서풍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퇴계는 그의 전대(前代)와 당대(當代)의 글씨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글씨 그리고 이를 따른 조선의 글씨들은 글씨의 본령인 전일함 즉 ‘경(敬)’과 거리가 먼, 형태적 아름다움만 추구한 그릇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글씨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언급은 정유일의 문집에서 볼 수 있다. 
 
필법(筆法)은 처음에 진법(晉法)을 따랐으나 뒤에는 다시 여러 글씨체를 섞어 취하였는데, 대체로 굳세고 강건하며 방정하고 엄격함을 위주로 하였으니, 사람들이 한 글자를 얻으면 백금(百金)처럼 귀중하게 여겼다.
筆法初踵晉法, 後又雜取衆體. 大抵以勁健方嚴爲主, 人得一字, 如寶百金.
        (정유일 『문봉집(文峯集)』 권4 퇴계선생 언행 통술(退溪先生言行通述) 중에서)
 
  ‘진법’ 즉 진(晉)나라의 법도란 동진(東晉) 왕희지의 서법을 가리킨다.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에 대한 추구는 조선 중기 서단(書壇)에 강하게 나타난 경향으로서, 조선 초기와 구별되는 중기 글씨의 큰 특징이다. 정유일은 또한 퇴계가 ‘중체(衆體)’ 즉 여러 서체를 섞어 취했다고 말했다. 이황이 왕희지를 중심으로 여러 서체를 취했던 것은 실물 자료를 통해 그 실제를 엿볼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상계종택(上溪宗宅)에서 수집된 퇴계 이황의 친필 서첩이 여럿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선조유묵(先祖遺墨)』20(보물 제548-2호, 자료ID: 86063)은 18점의 퇴계 필적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앞의 6개 면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8점의 글이 필사되어 있다. 앞의 4점은 삼국시대 위(魏)의 종요(鍾繇)의 서첩을 임모하였으며, 뒤의 4점은 왕희지의 서첩을 임모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선조유묵』20 첫 2개 면
 
  이황이 필사한 종요의 서첩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득장풍첩(得長風帖)〉, 〈상환첩(常患帖)〉, 〈설한첩(雪寒帖)〉, 〈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이다. 이것들은 모두 종요의 편지로 전해지는 것인데, 학서(學書) 자료로 종종 쓰였기 때문에 가장 앞 구절을 따서 ‘~~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첩은 정말 종요의 글인지, 그리고 종요가 쓴 글씨인지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 종종 왕희지가 임모한 글씨로 비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퇴계는 이를 종요의 글씨로서 인식하고 임모한 듯하다. 
 
  『선조유묵』20 첫 번째 면의 제1~4행은 〈득장풍첩〉을 임모한 것이다.
▲전(傳) 종요(鍾繇) 〈득장풍첩(得長風帖)〉(전체)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순화조첩(淳化祖帖)』 책2 중에서)
 
  위의 도판은 『순화조첩(淳化祖帖)』에 수록된 〈득장풍첩〉이다. 『순화조첩』은 북송(北宋) 순화 연간에 편찬된 법첩(法帖)으로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고도 불린다. 『선조유묵』20은 이 원래의 〈득장풍첩〉 가운데 앞의 절반 가량을 임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순화조첩』 첫 행 마지막 글자인 ‘심(心)’과 제4행 ‘필(畢)’ 자를 쓰지 않고 한 칸 비웠다. 이황이 가지고 있던 판본이 어떤 사정에 의해서인지 이 두 글자가 탈락된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의 임모는 〈득장풍첩〉 중간 ‘돈설(頓泄)’에서 갑자기 중단되고, 돌연 〈상환첩〉과 〈설한첩〉으로 넘어간다. 이황은 〈득장풍첩〉의 내용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오직 글씨 연습의 자료로 활용할뿐이던 것이다. 이후 〈묘전병사첩〉을 마지막으로 종요 글씨의 임모는 끝난다.

▲전(傳) 종요 〈상환첩(常患帖)〉, 〈설한첩(雪寒帖)〉(제5~10행 부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순화조첩(淳化祖帖)』 책2 중에서)

▲전 종요 〈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진당정서(晉唐正書)』 책2 중에서)
 
  『선조유묵』 제3면 제3행까지 〈묘전병사첩〉의 임모를 마친 후, 제4행부터는 왕희지 글씨를 썼다. 『선조유묵』 제3, 4면에는 차례로 왕희지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제현자첩(諸賢子帖), 〈이금경녀첩(爾今卿女帖)〉이 서사되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선조유묵』20 제3, 4면
왕희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묵적본(墨跡本) (도판 오른쪽 부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왕희지 〈이금경녀첩(爾今卿女帖)〉 (전본 다수)
 
  <이금경녀첩〉은 원본의 첫 줄은 쓰지 않고, 둘째 줄 ‘경녀(卿女)’부터 썼다. 종요의 〈득장풍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첩의 내용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유묵』20의 왕희지 글씨 임모에서 주목되는 점은, 퇴계가 서사한 것이 왕희지의 원본 글씨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쾌설시청첩〉 원본보다 퇴계의 임모는 글자의 높이가 상당히 낮은 점이 눈에 띈다. ‘시청(時晴)’이나 ‘안선(安善)’ 등 부분에서 낮은 체세(體勢)가 두드러진다. 

  『선조유물』20 앞부분 종요와 왕희지 서첩 임모의 글씨는 기실 거의 변화가 없이 일관되어 있다. 내용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 것이 종요의 글씨이고 어느 것이 왕희지 글씨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종요 쪽에 더 가깝다. 『선조유묵』20의 왕희지 글씨는 그다지 왕희지 글씨답지 않으며 종요 글씨에 동조(同調)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종요 글씨의 원본은 없으며, 그의 글씨로 전해지는 것은 모두 후대의 탑본(榻本)이어서 종요 글씨 원래의 모습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종요의 해서는 후대에 즐겨 임모되었기 때문에 종요 탑본 글씨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각종 탑본을 통해 볼 수 있는 종요 글씨는, 초창기 해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완성기에 도달했던 초당(初唐)의 해서와 달리 초기 해서에는 예서(隷書)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종요의 법서(法書)로 널리 알려진 〈선시표(宣示表)〉를 보면, 가로획 위주의 글자 구성으로 인한 낮은 체세와 뚜렷한 파책의 영향이 보이는 획들에서 예서의 여전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종요 〈선시표(宣示表)〉 탁본. 북경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 소장
 
  위아래로 길어져 키가 커지고 획의 성격도 확연히 달라진 후대의 해서에 비하면, 종요의 해서는 확실히 고졸(古拙)해 보인다. 조선 중기에는 문화 전반의 복고적 경향과 더불어, 글씨 또한 ‘진법(晉法)’ 즉 동진(東晉)의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당나라 이전 한나라 이후의 서풍으로 회귀하고자 한 흐름이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조맹부 풍 글씨에 비하면, 이 시기의 글씨는 다소 예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때의 ‘고법(古法)’은 청나라 중기 이후와 조선 후기에 나타난 금석문의 탐구에 의한 예서와 전서 서풍의 유행과 같은 철저한 복고는 아니었다. 따라서 예스러움의 발현 양상과 정도는 서가(書家)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퇴계의 글씨, 특히 작은 해서 즉 소해(小楷)에서 확실히 종요와 왕희지 소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옛 글씨를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었다. 단정하며 단아한 퇴계의 글씨는, 법도를 지키면서도 여유롭고, 온화하면서도 느슨하지 않은 독자적 풍모를 지니고 있다. 이제 퇴계 서풍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씨의 예를 살펴보려 한다.

  이황의 아들 이준(李寯)은 아들 셋을 두었다. 즉 퇴계에게는 손자가 셋 있었다. 즉 안도(安道), 순도(純道)(醇道로도 씀), 영도(詠道)이다. 이 가운데 장손인 이안도와 둘째 이순도에게 써준 글씨를 살펴보겠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선조유묵(先祖遺墨)』14(자료 ID: 86057)는 주희(朱熹)의 〈재거감흥시(齋居感興詩)〉 20수를 쓴 것이다. 서문이나 발문 등이 없어 언제 어떤 정황에서 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군데군데 ‘이안도 장(李安道章)’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손자 이안도가 소장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각 면의 행수(行數)가 4행으로 일정하고 매우 단정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판각을 염두에 두고 써서 이안도에게 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선조유묵』14 ‘감흥시(感興詩)’ 첫 2개 면. 주희의 〈재거감흥시〉 제1수를 썼다.
 
  글씨의 특징으로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각 글자의 높이가 매우 낮다는 것이다. 즉 자체(字體)의 체세(體勢)가 낮다. 전체적으로 보아 종요 풍의 해서는 아니나, 이런 낮은 체세는 분명 종요 해서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체세를 이렇게 낮추기 위한 여러 고안이 보인다.

  위의 도판 첫 번째 면 제3행의 ‘음양(陰陽)’과 두 번째 면 제1행의 ‘부앙(俯仰)’의 좌부방을 주목해 보자. ‘음양’의 좌부방 ‘阝’와 ‘부앙’의 ‘亻’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위아래 길이가 매우 짧다. 특히 ‘亻’의 크기가 극도로 작은 점이 눈에 띈다. 이밖에 ‘무극옹(無極翁)’의 ‘극(極)’의 나무목 변(木) 등 작은 편방이 곳곳에 보인다. 이는 글자 전체의 높이를 낮추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제3수를 쓴 제5면의 ‘정(靜)’과 ‘체(體)’는 모든 요소의 높이를 낮춰 글자 전체의 높이를 자연스럽게 낮추었다. 제10면의 ‘실(實)’과 제12면의 ‘청(靑)’은 글자 아랫부분의 크기를 작게 하였다. 즉 ‘실’의 ‘貝’와 ‘청’의 ‘月’을 작과 짧게 하여 전체 체세를 낮추었다.
『선조유묵』14 정(靜)(제5면) / 체(體)(제5면) / 실(實)(제10면) / 청(靑)(제12면)
 
  소해(小楷)의 고법(古法)을 동원하여 체세를 낮추었으면서도, 글씨의 전체적 인상은 그리 생경하지 않다. 

  글씨의 온화한 인상은 둥그스름한 모양에서 기인한다. 위의 첫 번째 면의 곳곳에서 이러한 둥글고 유려한 획을 볼 수 있다. 제2행의 ‘대무외(大無外)’는 세 글자 모두 이러한 획을 갖고 있다. ‘대(大)’의 첫 획을 오른쪽 위에서 시작하며 왼쪽 아래로 돌려 내려가며, 그리고 마지막 획을 마무리하며 모두 둥글게 돌렸다. ‘무(無)’에서는 제7획을 길게 아래로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큰 커브를 그렸다. ‘외(外)’의 마지막 점 또한 길게 빼며 살짝 커브를 그렸다. 이런 둥근 획들은 글자 전체를 둥글게 만들며 모나지 않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데 한몫한다.

  모든 획은 단정, 단아하다. 퇴계는 고법을 원용하면서도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당대의 관용 또한 수용했다. 즉 전체 자체는 낮은 소해의 고법을 취하면서도, 획은 낯설지 않은 평이한 필법을 구사했다. 군데군데 획들에서 조맹부 해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조맹부의 〈현묘관 중수 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에서 이 『선조유묵』14와 비슷한 인상의 획을 가진 글자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맹부 〈현묘관 중수 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 (부분) (일본 東京國立博物館 소장)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이황 필첩 – 회암시첩』(유물번호: 서울역사015198)은 이황이 둘째 손자 이순도에게 써서 준 시첩(詩帖)으로서, 회암(晦菴) 주희의 칠언시(七言詩) 총24제(題) 47수를 썼다. 여기에는 끝부분에 간단한 발문이 있다. 즉 “융경(隆慶) 2년(1568) 무진년 3월 보름에 손자 순도(醇道)에게 써서 주다(隆慶二年戊辰暮春望 書與醇道孫)”라고 하였으므로, 퇴계가 68세 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첩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선조유묵』14와 달리 단일한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시 중에는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 등 학자들이 즐겨 음송하던 유명한 시도 있으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다. 특히 24번째 면에 쓴 <유자징이 멀리서 양가죽 옷을 보내며 ‘회인보의’라는 말도 함께 보내어, 절구 2수를 가볍게 지어 사례하니 천 리 밖에서 한 번 웃으시기 바람[劉子澄遠寄羊裘且有懐仁輔義之語戯成兩絶爲謝以發千里一笑]>부터 마지막까지는 『회암집(晦庵集)』 권9의 시들을 집중적으로 썼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첩에 쓸 시는 『회암집』을 직접 넘겨 읽어 가면서 선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황 필첩 – 회암시첩』 첫 번째 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글씨 또한 ‘감흥시’와 다소 결을 달리한다. 단정한 해서인 ‘감흥시’와 달리 여기의 글씨는 결구가 다소 성글고 획이 좀 더 분방하다. 특히 뒷부분은 해서가 아닌 행초서로 써서 더욱 분방하다. 
▲『이황 필첩 – 회암시첩』 제44, 45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러나 행초서의 경우도 둥그스름한 획의 모양과 전반적으로 다소 낮은 체세는 해서와 일맥상통한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퇴계는 글씨에서 ‘경(敬)’을 추구하였지 모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고 단정한 획, 그리고 둥그스름한 자체(字體)에서 오는 온화한 인상은, 해서와 행초라는 서체의 구분을 넘어 퇴계 글씨의 일관된 기조가 된다.

  퇴계 이황의 글씨, 특히 일상적으로 자주 썼던 작은 크기의 해서는 분명 일정 부분 시대적 소산이다. 종요와 왕희지의 소해(小楷)라는 당대 여러 서가(書家)들이 추구했던 기준에 퇴계 또한 어느 정도 부합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준을 그대로 추수하지 않았다. 그의 글씨는 독자적 인상을 갖고 있다. 단정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이 그것이다. 이런 인상은 억지로 이것저것 조합하여 이룬 것이 아니다. 차분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법도를 따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서사(書寫)한 과정이 결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퇴계 이황의 글씨는 철저한 학문적 연찬과 실천, 그리고 겸손하고 다정한 인품이 자연스레 합치되어 나타난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조선 유학자의 대표적인 글씨이다.
 
     
 글쓴이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실 승정원일기번역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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