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의 위치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7/10/02 [08:08]

                                      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의 위치

   
번역문

 

   감찰 박진경(朴晋卿)은 아뢰기를, “형조와 전옥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독한 추위와 여름철의 장마에는 장(杖)을 맞아 다친 죄인들이 오가며 움직이다가 상처가 덧나 죽는 사람이 없지 않으니, 죄인을 흠휼(欽恤)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또 처자들이 따라 다니면서 대답할 절차를 가르쳐 줌으로써, 죄인들로 하여금 정상을 숨기고 말을 바꾸도록 하니, 이로 말미암아 송사를 판결하는 관리들이 정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자복(自服)의 진술을 바친 도적(盜賊)의 경우, 그 처자들이 옥바라지 때문에 누구누구가 재산이 넉넉하므로 끌어들여 같은 패로 삼으라고 말하니, 추문(推問)할 때에 자기 패거리를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처자의 말에 따라 무고를 합니다. 무고를 당한 사람은 중죄에서 벗어나려면 집안 재산을 다 털어준 뒤에야 면하게 되고,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내 장을 맞다가 죽게 되니, 양민을 해침이 너무나 심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옥서를 형조의 뒷담 아래로 옮겨 설치하고, 원래 거기서 살고 있던 백성들을 전옥서 옛 자리로 옮겨 살게 한다면, 폐단을 모두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원문

監察朴晋卿曰: “刑曹與典獄署, 相距隔遠, 祁寒暑雨, 杖傷罪人往來行動, 不無加傷殞命, 有乖欽恤之意. 且妻子隨行, 敎以對答節次, 使之匿情變辭. 由是, 聽訟官吏得情爲難. 不特此也, 如盜賊已服招者, 其妻子要其養獄, 言某人富實, 宜援以爲黨, 及其推問之時, 不直告其黨, 從妻子之言而誣告. 其被告者欲免重罪, 盡以家財給之然後, 得免, 如或不爾, 則終殞杖下, 其爲賊良民, 莫甚. 臣意, 移排典獄署于刑曹後墻底, 其元居民移居于典獄舊基, 則弊端可以盡祛矣."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9年 2月 18日』

   
해설

   이 실록 기사는 감찰 박진경이 전옥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옥서를 형조 옆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전옥서는 형조의 옥수(獄囚)를 관장하는 종6품의 아문이다. 종친부, 의정부, 사헌부, 한성부 등 몇몇 직수아문(直囚衙門)이 있었지만 대부분 죄수는 모두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당시 전옥서는 재판하는 과정에서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기결수가 형기를 채우는 현대의 감옥과는 같지 않다. 즉, 전옥서 죄수들은 판결이 날 때까지 심리 장소인 형조와 구류 장소인 전옥서를 왕복해야 했다. 전옥서는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종로구 서린동 종각역 부근에 표지석(사진 왼쪽)이 있고, 형조는 현재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에 그 터를 알리는 표지석(사진 오른쪽)이 있다.

 

 

   죄수를 심리하는 곳인 형조와 장을 맞아 제대로 걸음을 걷기도 힘든 죄수를 데리고 가서 수감시켜야 하는 전옥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셈이다. 두 곳을 왕복하는 사이에 가족들은 죄수를 따라다니며 심문에 대처해야 할 방도를 일러주거나, 옥바라지를 위해 부유한 자를 무고하여 끌어들이라고 코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감찰 박진경은 전옥서를 형조의 뒷담 아래로 옮겨 설치하고, 거기에 원래 살고 있던 백성들은 전옥서 자리에 옮겨 살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전옥서를 옮겨 다시 짓는 것이 일단 용이하지 않다는 것, 즉 전옥서 건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새 자재를 가지고 지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되었고, 살던 주민들을 옮겨야 하는데 백성들이 감옥이 있던 자리에 가서 살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또 전옥서에는 형조 죄인만이 아니라 의금부, 육조,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들도 수금되기 때문에 전옥서가 형조와 멀다고 하여 옮겨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옥서와 형조를 왕래할 때 말이 누설될 수 있다는 문제는 감시를 좀 더 엄중히 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보았다.   (『연산군일기 9년 2월 19일』)

 

   중종 15년, 전옥서 근처에 불이 나서 집들이 잇달아 연소된 사건이 있자 잠시 죄인을 형조에 옮겨 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전옥서에 수감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중종실록(中宗實錄) 15년 2월 21일』) 전옥서 자체의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3년 뒤, 전옥서와 형조가 떨어져 있는 구조를 이용해 죄인이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죄인 고윤량(高允良)이 전옥서(典獄署)에서 본조(本曹)로 올라올 때에 본조 북쪽 문밖에서 정로위(定虜衛)라고 칭하는 5∼6인이 있었는데 인솔해 오는 나장(羅將) 및 군사를 구타하고 고윤량을 탈취하여 그를 도망치게 했습니다. ······ 전옥서 관원은 포승 묶는 것을 튼튼하게 하지 못한 죄로 추고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도성 안에서 대낮에 죄수를 겁탈해 갔으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랍다.  ······ 전옥서의 관원도 추고하라.”하였다.

[刑曹啓曰: “罪人高允良, 自典獄上于本曹時, 於本曹北門外, 有定虜衛稱名五六人, 歐擊率來羅將及軍士, 而奪取允良, 使之逃亡.  ······ 且推典獄官員不能堅其鎖縲之罪.” 傳曰: “劫奪罪囚於都城內白日之下, 至爲駭愕. ······ 典獄官員亦可推考.”] ( 『중종실록 18년 2월 8일』 )

 

 

   죄인 고윤량이 전옥서로부터 형조로 압송되어 갈 때에 사위인 자가 고윤량을 빼내어 도망치도록 한 것으로, 죄인의 수송 과정에서 말이 누설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탈옥도 가능했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훗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도 전옥서와 형조의 위치 문제로 말미암는 폐단에 대해 지적하였다. 전옥서가 형조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죄수를 전옥서에 수감하고 있다가 좌죄(坐罪)할 때 형조로 보내고 끝나면 다시 데리고 와서 수감하는 일을 매일 반복해야 했으며, 죄수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판결이 지체되고, 하루 정도 심문하면 될 일을 수십 일에 이르기도 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전옥서를 형조 안에 두어 형조가 직접 관리하도록 하고 전옥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반계수록 16, 직관제도 하(下), 전옥서』) 역시 문제점 제기에서 그쳤다.

 

   전옥서는 청사, 서리 장방, 사령청(使令廳), 상직방(上直房), 군사수직방(軍士守直房), 남옥(男獄)과 여옥(女獄)의 옥사(獄舍) 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옥과 여옥은 중종 13년에 담장이 둘러졌는데, 남옥과 여옥이 구분되어 있기는 했으나 죄수를 구별하지 않고 같이 수용하면서 중죄인들이 서로 간음하는 폐단이 생기고 옥중에서 아기를 낳는 일도 있어서 담을 쌓아 분리, 수용하였다. (『중종실록 13년 1월 6일』) 전옥서의 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에 대해선 너무나 많은 기록이 있다.

   박승종이 아뢰기를, “전옥서에 갇힌 무리를 살펴보니, 형조에서 수금한 자가 무려 80여 명에 이르고 의금부에서 옮겨 가둔 자도 6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옥사의 칸수는 새로 지은 것과 옛날에 있었던 것을 모두 합하면 아홉 칸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많이 갇혀 있기 때문에 반은 한데서 거처하는데, 날씨가 맑은 날에는 햇볕을 쬐고 비가 내리면 옷으로 비를 가리는 형편이라 병을 얻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홉 칸의 옥에 200명의 죄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형조에 말하여 그 가운데서 죄가 가벼운 자를 가려내서 보방(保放)하라.”하였다.

[朴承宗曰: “考見典獄署囚徒, 則自刑曹囚禁者, 多至八十餘人; 自禁府移囚者, 亦將六十餘名. 而典獄之間, 新舊竝九間, 而罪人之被囚, 若是之多, 故爲半露處, 晴日則曝坐, 下雨則衣簑, 以致得病者甚多.  ······ ” 王曰: “九間之獄, 二百之囚, 何以堪處? 言于刑曹, 擇其中罪輕者保放.( 『광해군일기 5년 6월 13일』 )

 

   이처럼 전옥서가 협소하고 수인들이 많아서 칸을 늘리는 것이 필요했으나 당시 위정자들은 감옥을 확장하는 것이 왕의 선정(善政)에 누(累)가 되는 일이고 옥방(獄房)을 늘리는 것은 백성들을 형벌로 몰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때에 맞추어 죄수를 판결하여 내보냄으로써 감옥을 비게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재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체옥(滯獄), 즉 판결이 지체되어 미결수가 감옥에 오래 갇혀 있으면서 기결수와 다름없게 되는 것이었다.

 

   옥에 수감되는 죄수들은 늘어났고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일도 많았으며, 옥중에서 자살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위치의 문제점도 계속 노출되면서 전옥서는 고종(高宗) 31년(1894), 감옥서(監獄署)로 바뀔 때까지 현재 자리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글쓴이조윤선(趙允旋)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주요 저·역서
  • 『조선후기 소송 연구』, 국학자료원(한국사연구총서 38), 2002
  • 『조선시대 생활사 4집』, 공저, 역사비평사, 2013
  • 『推案及鞫案』 번역 및 역주, 흐름, 2014
  • 『승정원일기』(영조 32)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2012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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