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권하는 사회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7/09/18 [07:46]

                                                    결혼 권하는 사회

   
번역문

   정종(正宗 정조) 15년 신해(1791) 2월, 주상께서 가난 때문에 백성들이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한성부의 오부(五部)에 명을 내려 혼인을 장려하고 혼례 날짜가 많이 남은 자는 빨리하도록 재촉하며 관청에서 혼수 비용으로 돈 5백 푼과 포목 2필을 보조해주고 매달 결과를 보고하게 하였다. 당시 서부(西部)에 사는 신덕빈(申德彬)의 딸의 나이가 21세였고, 김희집(金禧集)의 나이가 28세였는데, 두 사람만 혼기를 넘긴 상황이었다. 6월 2일 주상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부(五部)에 짝이 없는 남녀가 많은 것을 걱정하여 혼인을 장려하여 성사시킨 사람이 백 수십 명이나 되는데, 오직 서부에 사는 두 사람만이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이끌어내고 만물의 본성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처음에 체계를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고 정치는 끝맺음을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니 신덕빈과 김희집에게 권하여 좋은 일을 이루도록 하라.”
   두 사람의 혼약이 맺어지자 주상께서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제 짝을 만나 혼인한 남녀 중에 김희집과 신씨 부부처럼 절묘하게 기회가 맞아떨어져 이렇게 기막힐 정도로 몹시 기뻐할 만했던 경우는 없었다.”

원문

正宗十五年, 辛亥春二月, 上閔士庶貧窶, 男女婚媾, 或不以時, 敕京兆五部, 勸成, 期遠者趣之, 官助資裝錢五百布二端, 月輒以聞. 時惟西部申德彬之女, 年二十一, 金禧集年二十八, 二人愆期. 六月初二日, 上曰: “予念五部多鰥曠, 勸而昏者, 無慮百數十人, 惟西部二人, 禮未克成, 烏在其導天和而諧物性也. 事貴齊始, 政期勉終, 可勸德彬禧集, 俾完好事.” 言旣定, 上喜曰: “匹夫匹婦, 爰得其所, 未有如金, 申夫婦機會巧湊, 非常可喜, 若此之奇也.”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목민심서(牧民心書)』 「애민(愛民)」 제3조 「진궁(振窮)」 , 「혼인을 장려하는 정책은 우리나라 역대 임금의 유법(遺法)이니, 수령으로서는 성심으로 준수해야 할 것이다. [勸婚之政 是我列聖遺法 令長之所宜恪遵也]」

   
해설

   이 이야기는 원래 이덕무가 쓴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교적 짧고 단순한 내용이지만 「김신부부전」과 그 밖의 역사 기록을 보면 좀 더 풍성하고 흥미로운 사연이 있었다.

 

   1791년(정조 15) 2월 9일 한성부가 혼기를 넘겼는데 아직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 다른 말로 ‘과기미혼자(過期未婚者)’의 명단을 작성하여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 정조는 분노했다. 연초에 보고하게 되어 있는 명단을 해가 바뀌고 한 달이 넘어서야 보고했다는 점, 한성부의 인구가 수만인데 미혼자로 보고된 인원이 13명밖에 안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담당 관리들의 업무 태만을 의심한 것이다. 결국 정조는 관리들을 징계하고 미혼자를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을 내렸다.

* 이하의 ‘미혼자’는 모두 ‘과기미혼자’임.

 

   한성부에서 관내의 미혼자를 조사하여 보고하고 결혼을 장려하고 혼수품을 보조하는 일은 이전부터 매년 해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말 그대로 연례행사가 되다 보니 담당 관리들이 타성에 젖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참다못한 정조가 한 번 폭발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성부 소속 다섯 개 부의 관리들이 몇 달에 걸쳐 샅샅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정조의 예상대로 미혼자는 처음에 보고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예를 들어 3월 23일 남부에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미혼자가 24명이었고, 원래 미혼이었으나 조사 기간에 찾아내 혼인을 성사시킨 사람이 33명이었다. 미혼자들도 모두 석 달 이내로 혼인 날짜를 잡았다.

 

   다른 부의 조사 결과도 속속 도착했다. 한성부는 각 부의 보고서를 수합하여 6월 2일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른 부는 미혼자들을 모두 결혼시키거나 날짜를 잡는 데 성공했는데 유독 서부만 두 사람의 미혼자가 남았던 것이다. 한성부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보고한 것보다 훨씬 많은 수를 찾아냈고, 또 그들의 혼인을 거의 다 성사시켰으니 보고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두 사람이 남았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정치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관리들이 여전히 태만하다. 그런 취지로 한성부를 질책하며 보고서를 반려했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신덕빈의 서녀(庶女) 신씨와 김희집이다. 신씨와 김희집은 원래 따로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신씨는 혼수 문제와 길일을 택하는 문제로 혼례가 미뤄지고 있었고, 김희집은 양가의 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했다. 알고 보니 김희집이 서자 가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몹시 가난했다. 정조는 한성부에 다시 명하여 신씨는 길일을 다시 택하게 하고 김희집은 다른 좋은 짝을 찾아 결혼할 수 있게 하며, 두 사람에게 혼례에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더 보내 주게 했다.

 

   이 명령이 내려오자 서부령 이승훈이 한성부 관아로 달려갔는데 그곳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신씨의 정혼자가 파혼하고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이승훈과 한성부의 관원들은 이미 좋지 않은 주상의 심기가 어떻게 폭발할지 상상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이승훈이 묘수를 떠올렸다. ‘두 사람을 결혼시키자.’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승훈과 한성부 관원이 각각 중매자가 되어 두 집안의 의향을 물어 허락을 받아냈고 6월 12일로 혼인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조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예로부터 수많은 남녀가 결혼했지만 이 두 사람처럼 신기한 인연으로 맺어진 경우는 없었다며 기뻐했다. 얼마나 기뻤던지 왕실의 혼례를 제외하면 이보다 호화로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예식이 가능할 혼수품과 재물을 보내 주라고 명했다. “그들이 가난을 벗어나 부유해지는 것도 그들의 운수가 대통한 덕이니 지나치다 말할 것 없다”고 하며 예상되는 논란을 미리 차단하기도 했다. 4개월 전 정조의 분노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노력 끝에 결국 이렇게 정조의 환희로 마무리되었다.

 

   훈훈한 이야기지만 지금 시대에 겹쳐본다면 뜨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할 결혼을 국가에서 ‘장려’라는 명분으로 독촉하고 압박하여 작위적으로 혼인율을 높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는 연애결혼을 하는 시대가 아니었고, 또 주로 가난 때문에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혼례를 치를 수 있게 한다는 취지였으니 이해할 만도 하다.

 

   근래 급격히 줄고 있는 혼인율은 국가의 큰 관심사 중 하나이다. 혼인율 감소가 출산율 감소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 3십 년 뒤에는 서울의 직장가에서도 젊은이들을 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요즘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이기적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혼인율 감소의 이유는 다양하다. 어느 시대나 경제력은 중요한 문제이다. 아들이 아니면 낙태를 선택하던 야만적인 문화로 인해 남녀의 성비 격차가 커진 것도 이유가 된다. 또한, 맞벌이하는 경우조차 여성에게 전가되는 살림과 육아의 책임, 경력 단절, 그로 인해 가정에서 소외되어 돈 벌어 오는 기계로 전락하는 남성, 양쪽 집안의 지나친 간섭, 아이를 낳아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우기 어려운 사회 환경 등이 결혼에 대한 큰 부담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 ‘결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누군가는 또 말한다. 옛날에는 다 감수하고 희생하며 살았다고. 그게 문제다. 그 옛날이 조선 시대는 아니듯, 지금도 그 옛날은 아니다. 세상은 변했는데 여전히 옛날이야기를 들먹인다. 결혼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지 고통을 감수하고 희생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옛날이야기들은 에둘러 희생을 강요할 뿐 희망을 품을 만한 행복한 결혼 생활의 모범 사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애국하라고 한다. 정말 젊은이들의 이기심이 문제일까? 아닐 것이다.

 
글쓴이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저서 및 논문
  • 『사필,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공저), 한국고전번역원, 2016
  • 「필기의 관점에서 본 『이목구심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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