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다시보기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여는신문 | 입력 : 2017/09/11 [09:22]

 

 김홍도(金弘道)의 자(字)는 사능(士能)이요, 호(號)는 단원(檀園)이다. 아름다운 풍도(風道)를 지닌 데다가, 마음이 활달하고 구애됨 없어 사람들은 신선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다. 그가 그린 산수(山水)ㆍ인물(人物)ㆍ화훼(花卉)ㆍ영모(翎毛)는 기묘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神仙)을 잘 그렸다. 준찰(皴擦)ㆍ구염(句染)ㆍ구간(軀幹)ㆍ의문(衣紋)을 앞 사람들에게서 본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천기(天機)를 운용하여 신리(神理)가 시원스럽고 환한 모양이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으니, 화단(畫壇)의 특출한 솜씨였다.
   정조(正祖) 때 대궐에서 도화서(圖畵署) 화원(畫員)으로 있었는데, 매양 한 폭씩 올릴 때마다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임금은 일찍이 회칠한 큰 벽에 해상(海上)의 여러 신선을 그리도록 했다. 단원은 환관에게 진한 먹물 두어 되를 받들게 한 다음, 모자를 벗고 옷을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곧장 붓 휘두르기를 비바람 몰아치듯이 하니,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 그림 속의 바닷물은 들끓어서 집을 무너뜨릴 기세였고, 사람들의 생동하는 모습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듯 하였으니, 옛날의 대동전(大同殿) 벽화(壁畵)가 이보다 훌륭할 수 없었다.

원문

金弘道, 字士能, 號檀園. 美風道, 磊落不羈, 人目之以神仙中人. 畵山水ㆍ人物ㆍ花卉ㆍ翎毛, 無不臻妙, 尤工神仙. 皴擦ㆍ句染ㆍ軀幹ㆍ衣紋, 不襲前人, 自運天倪, 神理蕭爽, 奕奕怡人, 藝苑之別調也. 正廟時, 供奉內廷, 每進一畵, 輒稱旨. 嘗粉堊巨壁, 命畵海上群仙, 使宦者捧濃墨數升, 脫帽攝衣, 而立揮毫若風雨, 不數時而成. 水洶洶欲崩屋, 人踽踽欲凌雲, 古之大同殿壁, 未足多也.

-유재건(劉在建, 1793~1880),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8

   
해설

   준찰(皴擦)과 구염(句染)은 주로 산수화에서 구사하는 기법이다. 준찰은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주름을 넣는 기법이며, 구염은 먼저 사물의 윤곽을 그린 다음 그 안에다 색을 입히는 방법이다. 구간(軀幹)과 의문(衣紋)은 주로 인물화에 관한 용어다. 구간은 몸뚱이를, 의문은 옷의 문양을 뜻한다.

 

   대동전(大同殿)은 중국 당(唐)나라 궁전이었던 흥경궁(興慶宮)의 부속건물 이름이다. 흥경궁의 서북쪽에는 정전(正殿)에 해당하는 흥경전(興慶殿)이, 남쪽에는 대동전이 있었다. 대동전 벽에는 당대의 최고 화가였던 오도현(呉道玄)과 이사훈(李思訓)이 그린 산수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원(1745~?)이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을 필두로, 삼원삼재(三園三齋)가 중심을 이룬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ㆍ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ㆍ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ㆍ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ㆍ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ㆍ고송류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1)ㆍ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ㆍ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 마디로, 먼저 인품이 높아야 필법(筆法) 또한 높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풍속화가로만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단원의 신선도는 분벽에 그려졌던 「해상군선도」와 더불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소품(小品)을 몇 점이나마 볼 수 있다. 「선고지과(仙姑持果)」ㆍ「선동취생(仙童吹笙)」ㆍ「운상신선(雲上神仙)」ㆍ「신언인도(愼言人圖)」ㆍ「신선도(神仙圖)」ㆍ「선인채약도(仙人採藥圖)」 등이 그것이다.

 

▶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단원의 거작 「군선도(群仙圖)」를 빠뜨려서는 아니 된다. 바로 이 작품을 통해서 분벽의 「해상군선도」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미루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8폭 병풍으로 이루어진 호암미술관 소장의 「군선도」는 먼저 웅혼한 구도로 구경하는 사람들을 단박에 압도한다. 그리고 멋들어진 선묘(線描)는 물론이오, 신선들이 지닌 제각각의 기발한 표정은 너나없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맑고 상쾌하면서 발랄한 분위기는 그가 왜 단원인가를 말없이, 그래서 더욱 또렷하고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회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큰 스케일로 소재는 아랑곳없이 자유자재의 역량을 내보이는 작가는 참으로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기굴(奇崛)한 솜씨를 먼저 바탕으로 삼았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할 도리 밖에 없다.

 

   신선도를 그린 뒤에도 정조 임금은 그에게 금강산과 단양(丹陽)ㆍ청풍(淸風)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 등 사군(四郡)의 산수를 그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해당 고을에 각각 명하여 그가 먹는 음식을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신하들과 똑같이 하도록 하였다. 우정 일개 화공(畫工)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특별 대우였다. 그 사랑은 결국 음직(陰職)으로까지 이어졌으니, 단원은 벼슬이 연풍 현감(延豊縣監)에 이르렀다.

 

   다음은 단원의 기개와 낭만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했는데, 매우 기이했다. 돈이 없어 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그림을 구하고자 돈 삼천 전(錢)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이에 그는 이천 전을 덜어 매화와 바꾸고, 팔백 전으로는 술 몇 말을 받아다가 동인(同人)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남은 이백 전으로는 쌀과 땔감을 샀으니, 하루치도 되지 못했다. 그의 소탈하고 광달함은 이와 같았다.[家貧或食不繼. 一日, 有人售一梅, 甚奇. 無金可易, 適有乞畵, 贄錢三千. 乃捐二千易梅, 以八百沽酒數斗, 聚同人作梅花飮. 二百爲米薪資, 不一日計. 其疎曠如是.]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8

 

 

 
글쓴이유영봉(劉永奉)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주요 저서
  • 『고려문학의 탐색』, 이회문화사, 2001
  • 『하늘이 내신 땅』, 문자향, 2001
  • 『당나라 시인을 만나다』, 범한서적주식회사, 2009
  • 『천년암자에 오르다』, 흐름출판사, 201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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