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과 바꾼 비단

조여일 | 입력 : 2021/03/17 [19:23]

                                              목숨과 바꾼 비단

   
번역문

    마부인 홍대종(洪大宗) 등 : “저희는 해서고(海西庫)* 소속으로 예비용 말을 담당한 마부들입니다. 사신 행차가 압록강을 건넌 날에 중국에 바칠 예물과 길양식을 실은 짐바리가 책문(柵門) 밖의 비거리(碑巨里)에 도착하여 저희 다섯 명이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추워서 밤을 지낼 수가 없으므로 저희끼리 ‘싣고 온 짐 중에서 유단(油丹)을 빼내 덮으면 좋겠다.’라고 하고는, 짐짝을 뒤져 보니 안에 백목(白木)이 있기에 각자 몇 필씩, 모두 51필을 빼내서 몸을 덮었습니다. 그때 함께 자던 이작은돌(李者斤土里), 김동재(金同才), 최지협(崔之俠), 박시영(朴時永) 등에게 들키는 바람에 12필을 나눠주어 네 놈의 입을 막았습니다. 저희가 훔친 것은 실제로 51필인데 관의 공문에서는 81필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30필은 실로 저희가 알 바 아니지만,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혹독한 형벌을 받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81필을 저희가 모두 물어내어야지 더 어쩌겠습니까?” 

   화물 운반 담당 장교인 임치화(林致和)ㆍ정의정(鄭義正)ㆍ유경득(劉京得) : “저희는 화물 운반을 맡은 장교들로서, 하는 일이라곤 마부들을 인솔하는 것뿐입니다. 그날 저녁 마부들은 수풀 속에 흩어져서 잤고, 그들이 자는 곳을 일일이 지킬 수도 없었는데, 흉악한 놈들이 이런 변괴를 일으킬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원문

洪大宗等: “渠等以海西庫餘馬驅人. 使行次渡江之日, 馱載歲幣及乾糧等卜, 到柵外碑巨里, 渠等五人同爲止宿, 而日寒甚酷, 無以經夜. 故大宗渠向李周合等言曰‘所載卜中, 拔出油丹, 庇身禦寒爲好’云, 而搜見卜隻, 則內有白木, 故各各抽出, 合爲五十一疋, 而各自藏身之際, 爲同宿人李者斤土里ㆍ金同才ㆍ崔之俠ㆍ朴時永等所覺, 偸出五十一疋內, 十二疋則分給, 以爲四漢掩口之地. 渠等所偸, 實爲五十一疋, 而關文中見失數爻爲八十一疋, 則餘在三十疋, 實非渠等所知, 而與其不服徒受淫刑, 不若輸款之爲愈. 到此地頭, 八十一疋渠等擔當備納之外, 更無奈何?” 

領卜將校林致和ㆍ鄭義正ㆍ劉京得: “渠等爲領卜將校, 擧行只爲領率驅人等之事, 而及其日暮, 許多驅人散處林藪, 不能逐處守直, 而詎意兇漢作此變怪乎?”

 

- 『일성록(日省錄)』 순조 33년(1833) 4월 6일 평안 감사의 장계

 

 

 

해서고(海西庫): 황해도에 있는 마사(馬舍), 삼사신 중 서장관이 타는 말을 제공했다.

   
해설

    1828년(순조28)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의관(醫官) 및 비장(裨將)으로 북경에 다녀온 사람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이 기록한 『부연일기(赴燕日氣)』의 「노정기(路程記)」에 따르면, 경성(京城)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는 모두 3069리, 약 두 달이 걸려야 갈 수 있었다. 이 먼 길을 해마다 몇 차례씩 사신이 오고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중국의 신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동지사(冬至使)였다.

 

   동지사는 10월 중하순 경 서울을 떠나 12월 중하순 경 북경에 도착한다. 또한 때는 양력으로 11월 하순 혹은 12월 초순부터 1월 중하순까지로, 연중 가장 추운 시기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려면 이처럼 길고 험난한 일정을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관료들에게 그 길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였다. 문집 등에 있는 중요 인물의 연보를 보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실은 빼지 않고 기록하는 중요한 스펙이었다. 그 기회를 통해 대국(大國)인 중국의 정계 인물과 교분을 맺을 수 있고, 선진 문물을 접할 수도 있었다. 또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동생, 아들, 조카, 때로는 친구를 대동하여 그들에게 넓은 세상을 체험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중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인물 대부분이 자제군관으로 중국에 가서 보고들은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였고, 『열하일기(熱河日記)』 같은 불후의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신 일행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역을 맡은 역관, 호위하는 군관, 건강을 보살피는 의료진[醫官], 그 밖에도 일상의 시중을 드는 사람과 사신들이 타는 말을 몰고 중국에 바치는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실어 나르는 마부[驅人], 그리고 중국과의 공식 무역을 담당한 상인 등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수백 명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중 정사(正史) 기록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삼사신(三使臣)이라 불리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과 수석 통역관인 수역(首譯)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그 힘든 길을 갔다 왔는데도 이름이 거의 남지 않은 그들, 마부 같은 사람들은 그 시간 어디에서 자고 어떻게 지냈을까? 위 평안 감사의 장계는, 정사(正史)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은 마부의 실명과 사행 기간 그들 삶의 편린을 볼 수 있는 무척 드문 기록이다. 1832년(순조32) 동지사 일행이 중국에 가져가는 공식 예물인 세폐(歲幣)에서 비단을 81필이나 분실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전에도 가는 도중 수행원들이 말을 팔아먹거나 짐바리 하나 정도를 빼내어 팔아먹고는 분실했다고 핑계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때는 물량이 많고, 더구나 세폐여서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 사태가 꽤 심각했다.

 

   위의 기록은 범인을 잡아 신문한 내용이다. 임치화(林致和) 등 인솔 장교들의 진술을 보면 그들에게는 숙소가 제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각자가 알아서 수풀 속에 잠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추위를 막기 위해 싣고 온 짐바리에서 비단을 꺼내 덮고 잤다고 그들은 진술했다. 물론 변명일 것이다. 단지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훔친 양이 너무 많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자 일부를 나눠주어 입을 막았으며, 심지어 몰래 팔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의도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다. 그래서 그들은 흉악한 놈[兇漢]이 되어 몇 사람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고, 주범인 홍대종(洪大宗)은 사형당하였다.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고, 조정의 높은 분들은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타락한’ 일례로 상소 등에서 이 일을 간간이 거론한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아주 드물게 추위에 떠는 마부를 위해 옷과 버선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신이 있고, 병이 난 수행원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신이 있기는 하였다. 그뿐, 정부 차원에서 그들을 위해 어떤 조치를 했는지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기록이 전혀 없다. 기강의 해이와 민심의 타락이 왜 가속화되는지 원인을 깊이 짚어보는 위정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글쓴이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