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는 때에 마주하기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여는신문 | 입력 : 2020/05/13 [08:47]

                                        거리를 두는 때에 마주하기

   

 

향등과 불경으로 여생 보내니
세 가지 허깨비 마음 점차 트이네
무엇보다 닭 울고 비바람 치는 밤
남의 강압에 나의 현묘함 뺏길까 두려워라

 

香燈貝葉送殘年 향등패엽송잔년
三種幻心漸豁然 삼종환심점활연
最是雞鳴風雨夜 최시계명풍우야
怕他强力劫吾玄 파타강력겁오현

 

- 서형수 (徐瀅修, 1749~1824), 『명고전집(明臯全集)』 권2 「백씨의 정거시 시운에 차운하다[次伯氏靜居韻]」의 둘째 수

   
해설

   이 작품은 서형수가 친형인 서호수(徐浩修)에게 화답한 시로 서형수가 관직에서 파직되어 장단(長湍)의 명고정거(明臯靜居)에서 가거(家居)하던 중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인 가운데 자신의 작품에 불교적 취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서형수는 이 작품 외의 다른 작품들 곳곳에서도 불교적인 표현과 전거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작가이다.

 

   세 가지 허깨비 마음이란, 명(明)나라 때 하량준(何良俊)의 『사우재총설(四友齋叢說)』에서 어떤 노승이 한 말이다. 곧 수십 년 전의 영욕(榮辱)과 은원(恩怨)과 희비(喜悲)와 이합(離合)을 뒤미처 떠올리면서 거기에 연연해하는 과거의 허깨비 같은 마음, 어떤 일이 눈앞에 닥치면 어떻게 할지 두려워하면서 몇 번이고 재보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현재의 허깨비 같은 마음, 훗날의 부귀를 바라거나 공명을 이루고 치사(致仕)하여 전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거나 자손들이 벼슬하여 독서인의 가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미래의 허깨비 같은 마음이 그것이다. 닭이 울고 비바람 치는 밤이란 군자가 난세에 처해 있는 모습을 비유한 것으로 『시경』 「정풍(鄭風) 풍우(風雨)」에서 유래하였다. 남의 강압에 자신의 현묘한 경계를 빼앗긴다는 표현은 불전(佛典)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에 “남의 강압적인 지시로 인해 예전에 지은 생각을 일으켜 불선한 업을 짓는 경우[因他强力之所敎勅 發起故思 行不善業]”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선비가 뜻을 잃고 독처(獨處)하는 시간은 비로소 명리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나신(裸身)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휩쓸려 번다한 인연과 사무에 몸을 맡기다보면 자신이 애당초 원했던 것, 자신이 진심으로 추구했던 것,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가면 속에 숨긴 채 맡겨진 배역, 완벽한 타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마침내는 그 배역이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 시는 그것들이 다 허깨비였노라고 할(喝)한다. “죽고 나서야 마친다.[死而後已]”라는 증자(曾子)의 말을 단장취의하자면 참으로 인간은 이 허깨비 같은 마음으로 내달리는 일을 죽고 나서야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의 현묘함이란 무슨 신비하고 고원한 경지가 아니라 배역을 맡기 전의 나의 참모습,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갈구하는지 솔직해지는 자신의 본래자리. 그 자리를 거짓 없이 마주하고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이리라.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역에 충실하느라 얼마나 많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아니 그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혼란하고 어수선한 시국이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홀로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배역이 정지되고 무대의 불이 꺼진 뒤 찾아오는 급격한 고독함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독함에서 몸을 돌려 허깨비 같은 마음을 타파하고 나의 현묘함을 마주하고 몰입한다면 이 또한 비바람 치는 듯한 이 시국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글쓴이
이승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 『승정원일기』, 『창계집』, 『명고전집』,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