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기억하는 방법

한국고전번역원

조여일 | 입력 : 2019/09/25 [09:53]

                                     부모님을 기억하는 방법

   
번역문

    한 방에서 불길이 일어났는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살아남았습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겠으나 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스스로 생각건대, 죽기 전의 책무는 오직 선친의 유고(遺稿)를 정리하고 선친의 사적(事跡)을 손수 구비한 다음 입언군자(立言君子)의 글을 얻어 후세에 영원히 인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창자가 썩고 끊어지면서 인리(人理)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이 또 천고의 한이 될까 몹시 걱정입니다. 만약 어르신처럼 선친과 동시대를 살면서 친분을 나눈 분이 시나 글을 지어 은혜롭게 한마디 말로 지하에 계시는 선친을 빛내주신다면, 알려지지 않은 선친의 덕이 드러나고 훗날에도 징험되어 만분의 일이라도 원통함을 조금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객지에 있느라 종이가 없는 터라 편폭을 갖추어 삼가 청하지 못하니, 무척이나 황송합니다. 하관(下棺)에 앞서 빠른 시일 안에 은혜로이 보내주신다면 지극히 애절하고 간절한 저의 마음에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예를 다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원문

乃一室火起, 父死子生. 是則不孝, 無形如淞, 而後方得以一日延息矣, 尙何言哉! 自念未瞑之責, 惟在於梳洗遺稿, 手具事行, 乞言於立言之君子, 無至永泯於後世. 而顧此假或不死, 腸蝕肚折, 無復人理, 誠恐此事難卒, 又爲千古之恨. 若得倂世交親之如吾閤下者, 或詩若文, 惠以一語以賁泉塗, 則庶或揄揚潛隱有徵來後, 少慰此萬一之寃恨. 旅次無紙不能具幅拜請, 殊甚惶悚. 惟願從速成惠於未窆之前, 千萬哀懇之至. 不備.

-이송(李淞, 1725~1788), 『노초집(老樵集)』권6, 「상서감사서(上徐監司書)」

   
해설

   “2년 전 게시판에 부모님 동영상 찍어놓으라고 하신 분 감사드립니다.” 평소 자주 들리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눈길을 잡아끈 글 제목이다. 익명으로 올라온 이 글의 내용은 이렇다. 이태 전쯤 부모님 동영상을 찍어놓으라고 한 글을 읽은 글쓴이가 감명을 받아 부모님과 동영상을 찍었다. 별다른 주제 없이 부모님과 본인, 세 명의 가족이 어색해하며 찍은 영상이다. 그런데 1년 전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이후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글을 읽고 찍어두었던 가족의 영상뿐이었다. 글쓴이는 이후로도 몇 번이고 이 영상을 돌려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고 했다. 처음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라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모님 동영상을 찍어두라고 글을 남겼던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수의 사용자들이 이 게시물을 열람했고 또 그 수만큼이나 댓글도 많이 달렸다. 저마다 자신만의 사연을 짧게나마 덧붙였는데, 대부분 글쓴이에 공감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도 그 글을 읽고 나서 매년 부모님 생신에 동영상을 찍어두고 가끔씩 틀어본다는 사람, 목소리를 듣기 위해 부모님과의 통화를 자동 저장되도록 해놓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반대로 갑작스레 사고를 당해 동영상을 남길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이, 동영상을 편하고 자유롭게 찍는 시대가 오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이, 조실부모(早失父母)했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각자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부모님께 고마워하는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언제부턴가 청첩보다 부고(訃告)를 받는 일이 많아진 나에게도 제법 따끔한 울림을 주는 내용이었다.

 

   위에 제시한 글은 이송(李淞, 1725~1788)이라는 문인이 지은 글이다. 이송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의 문집이 완전히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그의 글은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을 애도하며 지은 「담헌홍덕보묘표(湛軒洪德保墓表)」, 그리고 홍대용의 정사(亭舍)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지은 제영시인 「애오려제영(愛吾廬題詠)」 정도만이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거쳐 활동했던 대표적인 한학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가 홍대용의 문집 『담헌서(湛軒書)』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송의 글을 입수하여 부록으로 실었던 덕분이다. 정인보는 이송의 글을 저 명문(名文)으로 손꼽히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1~1805)의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고, 문장으로 유명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이후 네댓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문장가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집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전모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사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이송은 32세에 아버지 이민곤(李敏坤, 1695~1756)을 눈앞에서 잃는 참상(慘狀)을 창졸간에 겪었다. 이민곤은 영조로부터 당습(黨習)의 혐의를 받아 유배를 가던 도중에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 숙소에서 화재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이송은 당시 아버지의 귀양길에 동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로부터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괴로움은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과 자책하는 마음에 대해 이송은 “한 방에서 불길이 일어났는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살아남았습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겠으나 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라고 표현하였다. 아버지가 상대 당의 공격을 받아 귀양을 가는 것만도 억울한데, 귀양길에 화재를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기막히고 원통할 일이었다.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자괴감, 그리고 혼자서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의 여생을 지배하는 트라우마가 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송은 탈상(脫喪) 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간 서산(西山, 오늘날 연천군 군남면으로 추정)에 은거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글짓기에만 몰두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이송은 평소 아버지와 친하게 지낸 서명신(徐命臣, 1701~1771)에게 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다. 벗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나 만사(輓詞)를 지어달라는 요청이다. 전통 시대의 장례 절차에서는 덕망과 학식이 높은 이로부터 망자(亡者)를 기리는 글을 받는 것을 무척 큰 영광으로 여겼고, 글을 써주는 이 역시 이를 가장 의미 있는 부의(賻儀)로 여겼다. 이 일은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낸 이송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책무였을 것이다. 그 애절하고 간곡한 마음을 짐작키는 어렵지만 아마도 떠난 아버지를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여 이제는 명망 있고 글 잘 쓰는 지인의 글을 받아 부모님을 기억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기술의 발전 덕분에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로 부모님의 모습과 목소리를 손쉽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어색함과 쑥스러움만 덜어낸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소중한 기억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잠시 꺼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될 일이다. 기다려주지 않고 떠난 부모님에게 다하지 못한 마음을 후회하기보다는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는 일흔 살 노래자(老萊子)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 다행히 이송의 문집 『노초집(老樵集)』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으며, 원문이미지를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도 있다. 정인보가 전편을 열람하였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무척 궁금하다.

  

 

글쓴이백진우(白晋宇)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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