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떡 빚으며 살아간다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여는신문 | 입력 : 2019/07/10 [07:19]

                                       누구나 자기 떡 빚으며 살아간다

   
번역문

    오서산(烏棲山)의 승려 설오(雪悟)는 예전부터 어울리던 자이다. 오늘 아침에 나를 찾아왔기에 뜰을 거닐며 함께 봄 경치를 감상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설오에게 물어보았다. “산승께서는 집안 걱정이나 자식 걱정이 없겠구려. 길을 떠나면 바리때와 짧은 지팡이 하나로 이곳저곳 산수를 누비고, 절에 머물면 조용한 책상 앞에 방석 깔고 참선하며 승복 입고 푸성귀를 드시겠죠. 평생 육신도 가볍고 평안할 것이니, 귀하게 여길 것이라고는 맑은 마음과 적은 욕심으로 번뇌를 없애는 일 뿐이겠습니다.

 

노사께서는 평생 동안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셨으니, 이제 죽음이 멀지 않다는 근심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설오가 대답했다. “저는 올해 일흔 셋입니다. 눈은 어둡고 귀는 먹었으며 흙덩이나 나무토막 같은 제 몸도 이미 제 것이 아닌 지경입니다.

 

세 끼 밥도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하는 터라 언덕에 가득한 소나무만이 제 굶주림을 면케 해주는 식량입니다. 풍년에도 이 지경이니 흉년에는 어떨는지 아시겠지요. 또 만약 한 두 해가 더 지나게 되면 똥오줌 가리는 일도 제 맘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곧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고통스럽게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행이 칼로 만든 산과 물보다도 심하여, 편안하게 죽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마치 극락을 밟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이처럼 늙어서 죽지 못한 한을 단지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의 승려 가운데 늙어서 의지할 곳 없는 이라면 누가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전생(前生)의 덕업이 있어 현생의 복록을 누리고 계십니다.

 

젊어서는 영화롭게도 지방 현령을 지내셨고, 늘그막에는 좋은 경치 속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십니다. 10년간 이처럼 지내시니 주위의 진귀한 꽃과 풀은 신선이 살고 노닐었던 승경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고기와 새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이제 본분이 되었지만 의복이나 음식과 같은 살림살이 형편도 아무런 불편한 점이 없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지는 우환에 대해 전혀 얽매이지 않으시니 참으로 재가출가(在家出家)의 경지입니다. 그러니 비록 황미옹(黃眉翁)처럼 골수를 씻고 털을 가는 몇 천 년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싫증나거나 지루하다는 탄식을 하시겠습니까?” 그의 말 속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나는 산승의 생애를 부러워하고 산승 또한 나의 넉넉한 삶을 부러워하였다.

 

이는 실로 서로 마음으로만 헤아리고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니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모두 상대방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대개 정력이 이미 쇠진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웃음을 머금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에 유가와 석가가 다를 것이 무어 있겠는가?

원문

烏棲山僧雪悟從前往來者. 今朝來謁散步中庭, 共翫春色. 而叙話從容仍問曰, “山僧無家累子孫之憂. 而行則一鉢短笻千水萬山, 居則靜几蒲團麻衣草食. 一生安靜四大輕安, 所貴於身者, 淸淨寡慾以除煩惱. 而老師百年之間, 能享此樂, 得無茶毗不遠之憂也.” 老師曰, “貧道今年七十三. 目暗耳聾, 土木形骸, 已非我有. 三椀契活, 亦不得繼, 滿塢蒼髥, 爲余救飢之糧. 樂歲如此, 凶年可知. 如過一二寒暑, 則便旋之路, 亦不得任情. 將爲棄物, 辛苦未死之厄, 甚於刀山劍水, 冥然歸化如赴樂地. 不但貧道老而不死之恨如是. 凡緇道之老而無依者, 孰無此心? 至於老爺, 前生受業, 以享今世之福祿. 少經五馬之榮貴, 晩占一壑之風煙. 經濟山林十年於此, 奇花異草, 無異閬苑仙圃苑林之勝. 魚鳥之樂, 乃是本分, 而若以居養言之, 衣服膳㗖之節, 無不便適. 而世間憂冗, 一不嬰念, 眞箇在家而出家. 雖經黃眉翁一洗髓一代毛之年, 有何厭苦支離之歎耶?”傾羨之心, 津津於言語之間. 我羨山僧之生涯, 山僧亦羨我之厚享. 良由於彼此所擬於心者, 不得親經, 而易地則皆然. 大抵精力已盡無所徯, 則含笑入地之心, 儒釋何殊?

-정각선(鄭覺先, 1660~1743), 『두릉만필(杜陵漫筆)』권2 中

   
해설

   말썽만 일으키는 아이에게 시달리는 부모는 차라리 아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난임으로 고생하는 부부는 못난 자식이라도 하나 얻는 일이 평생의 소원이다. 반복되는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에 지친 행정병(行政兵)은 일과 시간이 보장된 전투병(戰鬪兵)을 부러워하고, 무더위와 맹추위 속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전투병들은 사무실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행정병을 부러워한다.

 

숙소 비용을 아껴가며 힘들게 여행하는 대학생들은 직장인들의 금전적 여유가 부러울 테고, 상사 눈치를 보며 휴가 날짜를 잡기도 힘든 직장인들은 대학생들의 시간적 여유가 부러울 테다. 이런 예는 일일이 다 들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고, 서양 속담에는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남이 가진 것을 더 부러워하는 마음과 관련해 『장자(莊子)』에는 이런 언급이 보인다

 

외발 짐승 기(夔)는 다리가 많이 달린 지네[蚿]를 부러워하고, 지네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마음[心]을 부러워한다. [夔憐蚿, 蚿憐蛇, 蛇憐風, 風憐目, 目憐心.]
-『장자(莊子)』, 「추수(秋水)」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기(夔)는 다리가 많이 달려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지네[蚿]를 부러워한다. 그런데 지네는 발이 많은데도 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뱀을 부러워한다. 그런 뱀도 형체도 없이 휙휙 소리만 내며 순식간에 북쪽 바다에서 남쪽 바다까지 날아가는 바람을 부러워한다. 기, 지네, 뱀, 바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널리 자유롭게 살펴보는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형체 없는 것까지 알 수 있는 마음[心]을 부러워한다.

 

   인용한 글의 저자 정각선은 그리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 42세가 되어서야 김화현감(金化縣監)으로 벼슬을 시작하였고, 이후 여덟 고을의 수령을 맡아 외직을 전전하다가 66세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관직을 마친 뒤에는 고향인 홍성(洪城)에서 조용히 은퇴 생활을 즐겼다. 이때 남긴 저술이 필기잡록 성격의 『두릉만필』이다. 위의 이야기는 이 저술에 실린 400여 조목 기록 가운데 하나이다.

 

   은퇴 후 한가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정각선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승려 설오(雪悟)가 찾아왔다. 집 앞을 한가롭게 함께 거닐며 봄 경치를 감상하다가 문득 정각선이 설오에게 부러움 섞인 말을 건넨다. 집안 걱정이나 자식 걱정 없이 평생 승려로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부럽노라고.

 

   참선이 덜 된 승려였을까? 설오의 대답이 제법 장황하다. 자신은 이미 한참 늙어서 눈과 귀가 어둡고, 매일 굶주리고 있으며, 장차 더 나이가 들면 용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한탄한다.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더욱이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 힘든 만년(晩年)을 보내고 있는 승려라면 누구라도 자신과 비슷한 마음일 것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답은 유자(儒者) 정각선에 대한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설오의 눈에 비친 정각선은, 젊었을 때는 현령을 지낸 관운(官運)이 있고 은퇴한 뒤로는 좋은 경치 속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여유로운 인물이다. 근심이나 걱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런 삶이라면 선인(仙人) 황미옹(黃眉翁)처럼 수천 년을 산다고 해도 인생이 싫증나거나 지루할 이유가 없다고 부러워한다. 이처럼 좋은 밥 먹고 좋은 옷 입고 살아가는 생활을 부러워하는 설오의 모습은 세속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유자인 정각선은 승려인 설오의 삶을 부러워하고, 또 승려인 설오는 유자인 정각선의 삶을 부러워한다.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다면 70대 중반이 되어서도 아직 각자의 수양(修養)을 이루지 못한 군자와 승려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집안이며 자식 걱정을 하는 유자 정각선과, 먹을 것이며 건강 걱정을 하는 불자 설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 대화는 무척 사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한 삶을 부러워하고, 그런 모습으로 한 번 살아봤으면 하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듯하다. 그런데 또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가운데, 또 어떤 이는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결국 남이 가진 것은 크게 보이고, 내가 가진 것은 작게 보이는 것 아닐까?

 

   대화 끝에 정각선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산승의 생애를 부러워하고, 산승은 나의 넉넉한 삶을 부러워했다. 이는 실로 서로 간에 마음으로만 헤아리고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서로 상대방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무더위 속에서는 혹한(酷寒)이 낫다고 생각하고, 강추위 속에서는 혹서(酷暑)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긴 가뭄 속에서는 홍수가 낫다고 생각하고, 홍수를 만나면 차라리 가뭄이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늘 현재를 중시하고 자기를 중시한다. 똑같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나의 고통은 남들의 몇 배는 되는 것 같고, 똑같은 즐거움을 얻더라도 남의 행복은 나의 몇 배는 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수치가 될 수는 없다. 적당한 부러움과 질투는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극제가 될 수 있지만, 지나쳐봐야 결코 아무런 득 될 일이 없다.

 

   모양과 크기는 다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짐을 등에 지고 견디며 살아간다. 내가 부러워하는 남의 떡이 사실은 그가 평생 지고 살아가는 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질 수 없는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남이 부러워하는 내 떡을 아끼며 예쁘게 빚어보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백진우(白晋宇)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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