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산(烏棲山)의 승려 설오(雪悟)는 예전부터 어울리던 자이다. 오늘 아침에 나를 찾아왔기에 뜰을 거닐며 함께 봄 경치를 감상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용히 설오에게 물어보았다. “산승께서는 집안 걱정이나 자식 걱정이 없겠구려. 길을 떠나면 바리때와 짧은 지팡이 하나로 이곳저곳 산수를 누비고, 절에 머물면 조용한 책상 앞에 방석 깔고 참선하며 승복 입고 푸성귀를 드시겠죠. 평생 육신도 가볍고 평안할 것이니, 귀하게 여길 것이라고는 맑은 마음과 적은 욕심으로 번뇌를 없애는 일 뿐이겠습니다.
노사께서는 평생 동안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셨으니, 이제 죽음이 멀지 않다는 근심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설오가 대답했다. “저는 올해 일흔 셋입니다. 눈은 어둡고 귀는 먹었으며 흙덩이나 나무토막 같은 제 몸도 이미 제 것이 아닌 지경입니다.
세 끼 밥도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하는 터라 언덕에 가득한 소나무만이 제 굶주림을 면케 해주는 식량입니다. 풍년에도 이 지경이니 흉년에는 어떨는지 아시겠지요. 또 만약 한 두 해가 더 지나게 되면 똥오줌 가리는 일도 제 맘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곧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고통스럽게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행이 칼로 만든 산과 물보다도 심하여, 편안하게 죽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마치 극락을 밟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이처럼 늙어서 죽지 못한 한을 단지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의 승려 가운데 늙어서 의지할 곳 없는 이라면 누가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전생(前生)의 덕업이 있어 현생의 복록을 누리고 계십니다.
젊어서는 영화롭게도 지방 현령을 지내셨고, 늘그막에는 좋은 경치 속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십니다. 10년간 이처럼 지내시니 주위의 진귀한 꽃과 풀은 신선이 살고 노닐었던 승경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고기와 새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이제 본분이 되었지만 의복이나 음식과 같은 살림살이 형편도 아무런 불편한 점이 없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지는 우환에 대해 전혀 얽매이지 않으시니 참으로 재가출가(在家出家)의 경지입니다. 그러니 비록 황미옹(黃眉翁)처럼 골수를 씻고 털을 가는 몇 천 년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싫증나거나 지루하다는 탄식을 하시겠습니까?” 그의 말 속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나는 산승의 생애를 부러워하고 산승 또한 나의 넉넉한 삶을 부러워하였다.
이는 실로 서로 마음으로만 헤아리고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니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모두 상대방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대개 정력이 이미 쇠진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웃음을 머금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에 유가와 석가가 다를 것이 무어 있겠는가?
烏棲山僧雪悟從前往來者. 今朝來謁散步中庭, 共翫春色. 而叙話從容仍問曰, “山僧無家累子孫之憂. 而行則一鉢短笻千水萬山, 居則靜几蒲團麻衣草食. 一生安靜四大輕安, 所貴於身者, 淸淨寡慾以除煩惱. 而老師百年之間, 能享此樂, 得無茶毗不遠之憂也.” 老師曰, “貧道今年七十三. 目暗耳聾, 土木形骸, 已非我有. 三椀契活, 亦不得繼, 滿塢蒼髥, 爲余救飢之糧. 樂歲如此, 凶年可知. 如過一二寒暑, 則便旋之路, 亦不得任情. 將爲棄物, 辛苦未死之厄, 甚於刀山劍水, 冥然歸化如赴樂地. 不但貧道老而不死之恨如是. 凡緇道之老而無依者, 孰無此心? 至於老爺, 前生受業, 以享今世之福祿. 少經五馬之榮貴, 晩占一壑之風煙. 經濟山林十年於此, 奇花異草, 無異閬苑仙圃苑林之勝. 魚鳥之樂, 乃是本分, 而若以居養言之, 衣服膳㗖之節, 無不便適. 而世間憂冗, 一不嬰念, 眞箇在家而出家. 雖經黃眉翁一洗髓一代毛之年, 有何厭苦支離之歎耶?”傾羨之心, 津津於言語之間. 我羨山僧之生涯, 山僧亦羨我之厚享. 良由於彼此所擬於心者, 不得親經, 而易地則皆然. 大抵精力已盡無所徯, 則含笑入地之心, 儒釋何殊?
-정각선(鄭覺先, 1660~1743), 『두릉만필(杜陵漫筆)』권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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