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와 대관(大觀)을 이야기하랴!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여는신문 | 입력 : 2019/06/26 [07:43]

                         나는 누구와 대관(大觀)을 이야기하랴!

   
번역문

    한갓 입과 귀만 의지하는 자와는 배움을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 하물며 평소 정량(생각의 범위)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고 말한다면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천하 세계를 보았다고 하면 헛되고 망령되다고 물리칠 것이다. 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뒤를 돌아 나왔다고 하면 괴상하고 헛된 소리라고 꾸짖을 것이다. 나는 누구와 함께 하늘과 땅 사이의 대관(大觀)을 이야기해야 한단 말인가?

원문

徒憑口耳者, 不足與語學問也. 況平生情量之所未到乎! 言聖人登泰山而小天下, 則心不然而口應之. 言佛視十方世界, 則斥爲幻妄. 言泰西人乘巨舶, 遶出地球之外, 叱爲怪誕. 吾誰與語天地之大觀哉?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서(馹汛隨筆序)」

   
해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시도해 보지도 않고 산만 높다고 탓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시조이다. 흔히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말할 때 태산(泰山)을 거론한다. 태산은 중국의 산둥성에 있는 실제의 산이다. 중국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불린다. 중국인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오르고 싶은 산으로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 중국의 학자들은 높고도 아름다운 산을 이야기할 때면 태산을 자주 호명했다. 중국에 사대(事大) 정신을 갖고 있던 조선의 선비들은 태산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산은 아주 크고 높은 것을 비유하는 관습적인 말이 되었다. ‘걱정이 태산’이라거나 ‘티끌 모아 태산’ 등 관용어도 생겨났다. 양사언이 지은 위의 시조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런데 태산의 실제 높이는 1천 5백 미터 남짓이다. 태산이 속한 중국의 산둥성은 들판 위주의 지역이라 태산이 가장 높았던 것인데, 실제 태산을 보지 못한 조선인들은 중국의 학자들이 태산을 가장 높고 아름답다고 말을 하니 한라산이나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하늘 끝까지 닿은 산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곧 태산은 조선 사람들의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산이었다. 실제로 본 사람이 없으니, 태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귀에서 입으로 전해온 것이다. 비단 저뿐이랴?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고서 남에게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내 삶에서도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연암은 입과 귀만 의지하는 자와는 배움을 얘기할 것이 못 된다고 말한다. 남한테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생각 없이 그대로 전하기만 할 뿐 조금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배움을 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고 한다. 『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은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은 것이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일 뿐이니 어찌 일곱 자의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軀哉?)"라고 말한다. 평범한 인간은 남으로부터 주워들은 것을 그대로 옮기기만 한다. 남에게 전해 들은 정보를 진실이라고 우기며 경험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질 못한다. 연암은 말하길 평범한 사람[俗人]은 이상한 것이 많고 통달한 사람[達士]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했다. 백로의 세계만을 경험한 사람은 까마귀의 검은 색이 이상해 보이고 오리의 세계에서만 사는 사람은 학의 긴 다리가 위태로워 보인다. 저 사물은 이상할 것이 없는데 나 혼자 거부하며 화를 낸다. 하물며 자기 정량(情量), 곧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욕하며 밀어 내칠까 싶다.

 

   연암은 윗글에서 정량의 한계에 갇힌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먼저는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만을 순응하는 태도이다. 『孟子(맹자)』,「盡心(진심)」상(上)에서는 “공자께서 동산에 올랐더니 노나라가 작아 보였고, 태산에 올랐더니 천하가 작아 보였다.”라고 했다. 이 말을 두고 누군가 ‘공자께서 태산에 올랐더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 하셨어’라고 한다면 속으론 설마 그랬을까 의심하면서도 입으로는 ‘응당 그러셨지’라고 끄덕인다는 것이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보다 수백만 배 넓은 천하가 작게 보일 리 있겠는가? 하지만 속으론 아니라고 생각해도 입 밖으론 그랬겠지 하며 끄덕인다. 성인이자 지존자인 공자께서 그렇다고 하셨으니 무조건 끄덕이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상에 대한 거부감이다. 불경에서는 말하길, 부처는 혜안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보았다고 했다. 이에 누군가 부처가 천하 세계를 보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비난한다. 공자의 말이나 부처의 말은 온 천하를 다 보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취지의 말이다. 그러나 유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공자는 성인이고 부처는 이단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나고 죽을 때까지 성리학의 자장 안에서 맴돌았다. 그리하여 공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고, 성리학 이외의 사상은 허무맹랑하다고 배척해 왔다. 지식의 실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말했느냐가 참과 거짓을 구별 지은 것이다.

 

   세 번째는 지식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이다. 동양 사회는 전통적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믿어왔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마젤란의 세계 일주라든가 서양인이 배를 타고 동양에 왔다는 정보가 『직방외기(職方外紀)』등의 서학서(西學書)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을 거쳐 조선까지 알려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땅은 네모나서 바다 멀리 나가면 추락한다고 믿었다. 인간은 자신이 접해보지 못한 낯선 지식은 위험하고 불온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서양인이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고 말한다면 터무니없는 괴상한 말이라고 꾸짖는 것이다.

 

    조선 사회가 주자학만을 절대 진리로 믿을 때 연암은 불교와 장자, 서양 학문도 그 본질에서는 비슷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청나라는 오랑캐라고 욕하며 손가락질할 때 연암은 중국의 뛰어난 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저들의 기술을 배워 가난한 조선의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사람들이 지구는 네모나므로 바다 멀리 나가면 떨어져 죽을 거라고 믿을 때 연암은 지구는 둥글며 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동굴 속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갈 때 연암은 동굴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상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자신이 직접 보고 깨달은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으나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 범위 안의 세계만을 옳다고 고집하며 밖의 세계를 거부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간의 대관(大觀)을 이야기할까?’라는 연암의 탄식에는 경험의 세계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답답함이 있다고 하겠다.

 

   심리학에 따르면 한 개인이 옳다고 믿는 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경험이 익숙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믿는 진리는 내 정량의 범위, 곧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의 경험의 공간 안에서만 옳은 것일지 모른다.

 

   한(漢)나라 가의(賈誼)는 「복조부(鵩鳥賦)」에서 말한다. “작은 지식은 자신에게 사사로워 남은 천하게 여기고 자신은 귀하게 여기지만, 통달한 사람은 크게 보므로[大觀] 남이라고 안 될 것이 없다.[小智自私兮 賤彼貴我 達人大觀兮 物無不可〕” 이 말에 주석을 달아보련다. “통달한 사람은 정량의 너머를 두루 보기에 안과 밖을 선 긋지 않으며 약자와 이방인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다.”

 
글쓴이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

 

주요 저서
  • 『박지원의 글 짓는 법 』, 돌베개, 2013
  •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다락원, 2014
  •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샘터, 2015
  • 『고전필사』, 토트, 2015
  • 『교사인문학』, 세종서적, 2017(공저)
  • 『리더의 말공부』, 세종서적, 2018(공저) 외 다수의 저역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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