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스승 - 사기(史記)와 중용(中庸)

한국고전번역원

조여일 | 입력 : 2019/04/01 [21:46]

 꼰대와 스승 :
사기(史記)와 중용(中庸)

   꼰대라는 단어를 많은 사람들이 외래어로 알고 있다. '꼰대'는 은어로 '늙은이'를 뜻하며 학생들이 '선생님'을 지칭하는 은어라고 사전에 등재된 순수한 우리말이다. 다만, 은어이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표현이다. 왠지 어감이 듣는 이로 하여금 연장자들을 싸잡아 비하하는 말로도 들린다. 특히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 학생이 대놓고 나를 꼰대라고 부르면 굉장히 불쾌하고 당황할 것 같다.

 

   꼰대로 불리지 않으려면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열심히 알아보았다. 학생들에게도 물어보고 신문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찾아보았다. 모든 것을 종합하면 꼰대들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대부분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나 때는 말이야…”, “그거는 말이지…”라는 자기중심의 대화법과 식자(識者)인 양하는 거만한 태도이다. 꼰대는 강의시간이건 식사시간이건 사사건건 모든 일을 수행함에 과거 자신의 무용담이 대화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상대방이 처한 심각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문제가 뭔지도 모르면서 누가 이야기라도 꺼내면 남의 생각이나 해결책은 듣지도 않고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무조건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전형적인 꼰대이다.

 

   이렇다 보니 교수로서 제자에게 뭔가 자문을 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할 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나도 모르게 ‘내가 너 나이 때에는 말이지’라는 말을 안하려고 의식하다 보면 말을 멈칫하고 다른 표현을 찾다가 생각의 끈을 놓쳐 제자들에게 내가 진심으로 전하려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행위가 교수의 본업인데 이런 행위들이 꼰대의 특성이면 필연적으로 교수는 꼰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억울할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제자들은 학부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많던 적던 월급을 받으면서 나름 안정을 찾고, 가정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대학원에 진학한 제자들은 대부분 전일제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직업을 갖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대학원 졸업 후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지도교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혹여 이 제자가 학문을 게을리 하다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얻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학문의 길에 접어든 제자에게는 유독 잔소리가 많아지고 간섭도 많아진다. 잔소리의 근원은 내가 과거 대학원 시절 때의 고생하였던 모습과 절실함이라는 기준에서 출발한다. 결국 나와 비교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제자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이 친구가 나를 꼰대라고 생각하는구나.

 

   이럴 때마다 떠올리는 고전의 구절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부 예양편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  ‘사람은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 많은 사기의 좋은 문구 중에 자객 예양이 말한 대목이 나의 평생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예양은 지백(智伯)의 국사(國士)로서 충성을 다하였으나 지백이 조양자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에 대한 원한으로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조양자의 사람으로 잠입한다. 기회를 엿보며 조양자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잡혀서 스스로 자결하기 전에 심정을 표한 마지막 유언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 문구를 통해 단순하게 예양의 진한 의리와 충절을 칭송한다. 나에게는 예양의 의리도 나름 커다란 감동이었지만 그것보다 우선한 것이 있었다. 내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사람을 만난 예양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학문의 길에 접어든 제자도 나의 꼰대 짓에 대해 자신도 서운했겠지만, 지도교수인 나도 몹시 서운했다. 왜냐하면 제자가 나의 마음을 몰라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꾸지람이 자신이 미워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끼는 사랑의 말임을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나태한 모습과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에 혹시나 나중에 사회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비난받을까 부모로서 많이 두렵다. 이런 연유로 집에서의 행동거지에 대해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고, 성실하지 못함을 나무라면 역시 자식들도 영락없이 나를 꼰대로 간주한다. 그런데 나는 제자와 자식을 이토록 예뻐하면서 왜 그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기 어려울까? 제자에게 존경받고, 아버지로써 사랑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때 나에게 답을 주었던 고전의 문장이 있다. 중용의 6장이다.

 

“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중략)

 

   즉 윗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며, 상대방의 잘못함을 지적하기보다 잘하는 것을 칭찬하고 과한 꾸지람과 과한 칭찬보다 그 중간의 자세로 소통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매사 가르치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지금 현재의 모습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꼰대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임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전까지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제자와 자식들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를 다시 보면서 큰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상대방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꼰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고 상대방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아는 척하기 때문에 꼰대였던 것이다.

 

   요즘 아들과 이야기할 때에 가능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그 어떤 말에도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나를 점점 더 이해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한테 서운해 하였던 그 제자는 세월이 흘러 교수가 되었다. 내 제자가 자신의 제자들한테 꼰대소리를 듣지 않고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이 글을 쓰는 내내 든다. 내일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기와 중용을 다시 읽으라고 권해보려고 한다. 이런 내가 스승일까 아님 꼰대일까.

 

글쓴이남영준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주요 저서

  • 『최신정보검색론』, 교보문고, 2010
  • 『사회과학 주제정보원』, 한국도서관협회, 2011
  • 『과학기술 주제정보원』, 한국도서관협회, 2011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