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 송수권

조여일 | 입력 : 2019/03/15 [02:11]

<여승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 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온데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앞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