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8/11/22 [07:45]

                                              즐거운 나의 집

   

 

호젓이 문을 닫고 있으니 성시가 멀어
밝은 창 아래 때때로 남화경을 다시 읽노라
근년 들어 손님 끊고 대 보느라 정신없거니와
가을 되자 끼니도 잊고 꽃 따느라 바쁘다오
약 먹는다고 느는 백발을 어이 멈추리
책 읽어도 가난은 끝내 구제할 수 없다마다
양지바른 섬돌 밑에 오동나무 심어서
뜰안 가득 새 그늘을 실컷 드리우고 싶네

 

寂寂揜門城市賖적적엄문성시사
晴牕時復讀南華청창시부독남화
年來謝客貪看竹연래사객탐간죽
秋後忘餐事採花추후망찬사채화
藥餌何曾休白髮약이하증휴백발
詩書終不救貧家시서종불구빈가
堦南擬種靑桐樹계남의종청동수
贏得新陰滿院斜영득신음만원사

 

- 장혼(張混, 1759~1828), 『이이엄집(而已广集)』 권7 「그윽한 집(幽居)」

   
해설

    산자락 깊은 곳이 시인이 사는 집이다. 집에 앉아 세속을 잊기로는 『장자(莊子)』만큼 좋은 책도 없다. 대나무는 속기(俗氣)를 빼 주고, 국화를 따다 보면 도연명(陶淵明)이 그리워진다. * 속절없이 늙어가기만 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할 수 없는 처지를 돌아보면 불만이 없을 수도 없지만 오동나무 그늘 속에 조용히 묻혀 사는 길을 택한다.

 

   한양(漢陽) 도성의 서쪽 인왕산(仁王山) 밑에 살았던 장혼이 자신이 사는 집의 정취(情趣)를 읊은 4수의 연작시 가운데 마지막 수이다. 장혼은 중인(中人) 출신으로, 어려서 개에 물려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글공부에 매진하여 글을 가르치는 일로 살았다고 한다. 이후 32살에 처음으로 책을 인쇄하는 감인소(監印所)의 사준(司準)이라는 종8품 말단 벼슬을 받아 교정(校訂)하는 일을 했는데 정조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다고 정평(定評)이 나서 58살까지 종사하다 물러났다고 한다.

 

   장혼이 살던 곳은 오늘날 서촌(西村)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촌은 왕족, 사대부들이 풍광 좋은 곳을 차지한 가운데 그 사이사이 중인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곳이다. 특히 필운동(弼雲洞), 누각동(樓閣洞), 옥류동(玉流洞), 인왕동(仁王洞) 등이 이들이 몰려 살았던 곳으로, 장혼은 같은 중인 출신인 천수경(千壽慶), 김낙서(金洛瑞),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등과 이웃해 살며 교분이 깊었다. 처지와 신분이 같았던 이들은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시모임도 가졌는데 당시 장안에서 유명하였다고 한다.

 

   장혼은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평생지(平生志)」라는 글을 통해 묘사하면서 상상 속의 그 집을 이이엄(而已广)이라고 명명하였다. 한문(漢文)에서 ‘이이(而已)’는 ‘뿐이다’, ‘그만이다’라는 뜻의 어조사(語助辭)인데 이러한 어조사를 자기 집의 이름으로 삼은 속내는 그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혼자 지낼 때에는 헌 거문고를 만지고 고서를 뒤적이면서 그 사이에서 생활할 뿐이고, 생각이 나면 나가서 산속을 거닐 뿐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차리라 하고 시를 읊을 뿐이고, 흥이 나면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물을 마실 뿐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과 눈 오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등 그윽한 거처의 신비한 정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 어렵거니와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혼자 즐기다가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 이룰 뿐이다. 운수나 목숨의 차이는 나의 천명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 ‘이이(而已)’라고 명명한다.
[獨居則撫破琴閱古書而偃仰乎其間而已, 意到則出步山樊而已, 賓至則命酒焉諷詩焉而已, 興劇則歗也歌也而已. 飢則飯吾飯而已, 渴則飮吾井而已, 隨寒暑而衣吾衣而已, 日入則息吾廬而已. 其雨朝雪晝, 夕景曉月, 幽居神趣, 難可爲外人道也, 道之而人亦不解焉耳. 日以自樂, 餘以遺子孫, 則平生志願, 如斯則畢而已. 其屯亨也脩短也, 聽吾天而已. 故扁吾广以而已.]

 

 

   장혼이 풀어놓는 담박(淡泊)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이이(而已)’라는 어조사의 반복이 주는 묘한 울림이 장혼의 소박한 욕망을 함께 긍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용한 단락의 앞부분에서 장혼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홰나무, 벽오동, 포도넝쿨, 측백나무, 파초, 뽕나무, 무궁화, 해당화, 구기자, 장미, 매화, 작약, 월계, 사계화, 석류, 국화, 패랭이, 맨드라미, 진달래, 철쭉, 붓꽃, 국화, 과꽃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나무와 꽃을 초가라면 으레 있는 자리에 배치하여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며 열매를 따고 채소를 뜯으며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장혼의 소망이 간절하였던지 늘그막에 결국 그는 이이엄을 지어 뜻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이엄을 짓고 나서 박치도(朴穉度)라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가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이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이라는 시에서 “밥에 고기 없는 건 괜찮지만, 사는 곳에 대가 없게 해서는 안 되고말고. 고기 없으면 사람을 파리하게 할 뿐이지만,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사람의 파리함은 살찌울 수 있지만, 선비의 속됨은 고칠 수가 없다네.[可使食無肉, 不可使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고 읊은 일과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음주(飮酒)」 시에서 “사람 사는 곳에 초가를 지었으나, 시끄러운 거마 소리 들리지 않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마음 멀면 땅은 저절로 궁벽해지는 법이라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읊은 일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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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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