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열네번째 이색 ‘목은집’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8/08/27 [21:08]

    


▲ 목은 이색의 초상.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몰길 25, 금남사. 태종 4년(1404)에 제작한 것을 영조 42년(1766)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오른쪽 위에는 목은을 찬양한 글을 써놓았다.  

 

“내 학맥이 해외로 전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
규재(圭齋) 선생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건만
근래 들어 다른 물건은 값이 모두 뛰어도
내 글만은 제값 한번 받지 못하누나.
(『목은집』 시고 13권, 「일을 기록하다」)  

 


▲ 이색 선생의 묘.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9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세상을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물가는 예외없이 뛰고 있는데 심혈을 쏟아 쓴 내 글값은 딴판이다. 오르기는커녕 제값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군가? 원나라의 큰 학자 규재 구양현(歐陽玄, 1283~1357) 선생도 인정한 인재 아닌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들 생계에는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고려말의 국제인

자신의 학맥이 고려 사람 목은에게 전해질 거라던 구양현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목은이 세계제국을 이룬 원나라 서울에 가서 당당하게 인재들과 겨루어 과거에 급제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공을 거둔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발군의 인물이었다. 그는 거대한 제국에 위축되지 않고 패기있게 경쟁하였는데 그런 행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야사에 전해온다. 구양현이 자신을 찾아온 목은을 얕잡아 보고 다음과 같이 조롱섞인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짐승 발굽과 새 발자국이 중국 땅을 마구 밟는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목은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사방에 뻗히는군!”
제법이라 여긴 구양현이 다음 시를 불렀다.
“술잔을 들고 바다에 들어갔으니 바닷물이 많은 줄 알렸다!”
목은이 지지 않고 바로 짝을 맞췄다.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선 하늘이 작다고 말하는군!”  

 

구양현은 목은을 오랑캐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하고, ‘중국을 보니 놀랍지’라며 비웃었다. 목은은 바로 ‘개소리 말라’며 인물을 볼 줄 모르는 속 좁은 놈이라고 되받아쳤다. 무시하다 되레 당한 구양현이 “그대는 천하의 기이한 재사다.”라 인정했다는 것이다. 뻣뻣하고 오만한 중국 학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목은의 패기와 재치가 생생한 일화이다. 목은이 실제로 원나라에서 겪은 좌절과 고민을 생가하면 이 일화는 사실이기 어렵다. 목은은 결코 쉽게 고려와 원나라에서 쉽게 최고의 지식인 반열에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숱한 좌절과 각고의 노력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하여 큰 인물이 된 목은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말 지성계의 정점에서

목은은 지금은 충청도 서천군에 속한 한산이란 작은 고을 출신이었다. 문벌귀족 출신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함께 학문과 문학의 실력으로 고려에서도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하였다. 목은 부자는 당시 실력으로 무장한 신흥 유학자 세력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원나라에 유학할 때 성리학을 연구하여 유학자의 책임의식을 몸으로 익혔고, 당시로서는 중요한 실무 능력인 시문을 잘 지어 고려의 정치와 학문, 문학의 체질을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공민왕 시대에 성균관을 개편하여 시스템을 바꾸려 하였는데 목은이 그 책임을 맡아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을 주관하여 유학의 종장이란 위상을 확고히 거머쥐었다. 여말선초의 많은 인재들, 예컨대, 삼봉 정도전, 도은 이숭인을 포함한 대다수 지식인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학계와 문학계에서 목은은 태산북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정치가로서 목은은 신흥 유학자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는 편에 섰으나 나중에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 개혁파와는 노선을 달리하여 조선의 개국에는 부정적이었다. 문벌귀족의 정치에는 반대하였으나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고려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 변화의 중심에 서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과정은 고스란히 수많은 그의 시에 나타났다. 그의 시를 추동하는 힘은 혼란한 사회를 헤치고 가는 지식인의 자아였다. 50대초에 지은 <스스로 읊다>의 앞 대목에서 목은은 당시 사회를 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 ‘스스로 읊다’

 

인물이 분주하게 같은 길을 함께 가며
부질없이 집안 내세워 문벌을 다투누나.
시서를 읽었다고 다 군자 되지 않나니
정승들도 예로부터 평민에서 나왔다네.  

 

문벌귀족들은 세력을 다투며 집안을 내세운 반면, 향촌 출신 목은은 집안이 아니라 실력을 내세웠다. 집안 좋다고 다 잘나지 않고, 공부 많이 했다고 다 군자가 아니다. 개인을 말해야 하고,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당시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시를 통해 당시 사회를 예리하게 파헤쳤다.  

 

#조선시대 한문학의 개창자

목은이 지성계의 태두인 것은 분명하나 정치적 역량이나 권력의 소유에서는 아무래도 한발 물러나 있었다. 활동의 중심은 문학이었다. 정도전이나 정몽주와 같은 인물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그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였다. 깊은 인상을 남길 만한 단행본 저작이 없어서 일반 독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산문가였다.
 

생존시에 학문과 문학에서 맞상대가 거의 없었던 위치는 그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국제적 명성을 지닌 작가로서 글을 많이 쓰고, 쉽게 썼다. 목은은 쓰면 곧 글이 되는 작가였고, 어떤 소재든 글로 쓰는 작가였다. 그렇다 보니 때로는 정제되지 않거나 거친 작품도 없지 않았다. 목은은 마치 일기를 쓰듯이 시를 써서 삶에서 일어난 사건과 생각의 자초지종을 거침없이 시에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 점이 사대부 문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였고, 그는 조선시대 문학을 태동시킨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목은은 시도 훌륭하지만 산문은 한층 더 훌륭하다. 많은 작품 중에서 35세 때 쓴 <유사정기(流沙亭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 목은문고 제1권 <유사정기> 

 

천하를 겉으로 보면, 동쪽 끝으로는 해가 뜨는 부상(扶桑)에 닿고, 서쪽 끝으로는 곤륜산에 닿으며, 북쪽은 초목이 나지 않고, 남쪽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 이런 지역까지도 성인의 교화가 적시고 뒤덮고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때는 늘 적었고 분열된 때는 항상 많았다. 이야말로 내가 마음속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을 안으로부터 살펴보면, 힘줄과 뼈로 묶여 있고 성정이 약하게 작용하는 중에 마음이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우주를 감싸고 있고, 현상과 사물을 접하여 대응하고 있다. 위세와 무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간교한 꾀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바로 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천하의 한쪽 끝 치우친 곳에 처박혀 가만히 엎드려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다고 해도, 그의 흉금과 도량은 성인의 교화가 미치는 천하 사방 아무리 먼 곳이라도 미칠 것이다.  

 

35세때 외가가 있는 경상도 영덕의 영해에서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언젠가는 기필코 천하의 중심에 서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젊은 목은은 상상한 날개를 활짝 펼친다. 이 혼란한 세계에서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으나 천하 사방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말이다. 우주를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있는 인간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세계의 중심에 서라고 권유하는 목은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국제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거장의 흉금이 엿보인다.
 

목은은 종종 글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투덜대며 지식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시와 문장은 글의 내용과 문체의 특징, 그리고 유학을 토대로 한 사상적 경향 등 여러 면에서 조선 500년 문학의 길을 열어 놓았고, 그는 후배 문인이 배워야 할 모델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그의 후손은 뛰어난 문인을 많이 배출한 명가로 유명하니 목은은 글값보다 더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하겠다.
 


▲ 목은집 표지.  

 

■목은집(牧隱集)

시고 35권, 문고 20권에 목록 3권을 합해 모두 58권 29책의 거질이다. 태종 4년(1404)에 편찬되어 간행되었고, 인조 4년(1626)에 중간되었다. 시는 4262수, 산문은 232편이 수록되어 작품량으로 따지면 그보다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가 전후에 없다.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 수준에서도 그를 능가할 만한 작가는 많지 않다.

 

‘동문선’에도 많은 작품이 뽑혀 전하고, 서거정은 그의 시를 뽑아 ‘목은시정선’을 간행하였다. 그의 작품은 고려말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사료로서도 큰 가치가 지니고 있다.

글쓴이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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