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여덟번째 이황 '퇴계집'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8/05/23 [22:27]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⑧이황 ‘퇴계집’

 

#퇴계, 조선을 넘어 세계로

12월 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푸른 하늘에 갑자기 흰 구름이 몰려와 지붕 위에 모이더니 눈이 한 치 남짓 쌓였다. 잠시 뒤에 선생이 자리를 정돈하고 부축해 일으키게 하시고 일어나 앉아서 서거하시니, 곧바로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그쳤다.
 

1570년 음력 12월 8일,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1501∼1570년)이 세상을 떠나는 광경을 제자 이덕홍이 보고 기록한 것이다. 참으로 성자의 장엄한 낙조이다.
 

고칠현삼(古七現三)이란 말이 있다. 현대에 나온 책을 세 권 읽으면 고전은 일곱 권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전은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라 이미 검증되어 믿을 수 있다고 보증된 책이다. 우리나라의 고전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책은 무엇일까. 신라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중국 화엄종에서도 채택되어 해동소(海東疏)로 일컬어졌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당나라 때 이미 인도에서 번역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읽히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많이 읽힌 고전은 아마 이황의 저술인 『퇴계집』이 아닐까 싶다. 『퇴계집』이야말로 조선에 본격적인 주자학의 시대를 연 저술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우리 고전 중의 고전이라 평가함직하다.
 

또한 이황의 저술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이황을 주자(朱子) 이후 일인자로 칭송하였고, 일본에서 이황의 저술들을 일찍부터 간행되었다. 그 중에서 1811년 무라지 교쿠스이(村上玉水)가 편집한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 (전10권)은 이황의 편지를 가려 뽑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1945년 이전에 북경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 재단에서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인쇄하여 판매한 일도 있었으니, 유학의 본고장에서도 이황은 크게 존숭받은 셈이다.
 

현대에 와서는 대만 국립사범대학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미국과 독일에도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다.
 


▲퇴계의 구택.

 

 

#주자학의 시대를 연 대학자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라 하지만 이황 이전에는 아직 주자학의 정밀한 이론이 학자들 사이에 수용(受用)되지 못하였고, 고려 때 크게 유행한 불교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대유(大儒)로 일컬어지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술과 훈채(葷菜)를 먹지 않고 참선 공부를 하였으며 지리산에서 3년 동안 오경(五經)을 공부한 뒤에 유교와 불교가 자취만 다르고 본질은 같다고 했다든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여 호흡하는 공부인 수식(數息)을 통해 정력(定力)을 시험해 보았다고 하는 등의 기록에서 당시 학자들 사이에 참선 공부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황과 동갑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정좌공부를 좋아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황 이전에도 『심경』, 『근사록』, 『성리대전』등 성리학 저술이 일부 학자들에게 읽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에서 『주자대전』을 최초로 완독하고 연구한 학자는 이황이다. 『주자대전』완질은 중종 18년(1523년) 교서관에서 처음 간행하였고, 20년 후인 1543년에 늦은 나이인 43세로 이황이 처음 그 책을 입수하였다.
 

이황은 『주자대전』을 읽고 연구한 지 13년만인 56세 때 편저인 주자서절요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주자대전』의 편지 중에서 정수를 추려 모은 것으로 비록 편저이지만 이황의 주자학 연구의 깊이를 유감없이 보여준 명저이다. 이제 학자들이 방대한  『주자대전』을 다 읽지 않아도 주자학의 정수를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이 간행되자 학계의 신진 학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속속 이 책을 통해 주자학에 입문했으니, 조선에 본격적인 주자학의 시대를 연 것은 거의 이 책에서 비롯했다 해도 과인이 아닐 것이다.  주자서절요는 조선에서만 도합 8차례 활자와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4차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실로 사서삼경에 버금가는 권위와 영광을 누린 것이다.
 

한편 이황은 호남 선비들과의 우정이 특히 각별하였다. 33세 때 성균관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만나 의기투합한 이후로 환로에서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금호당(錦湖堂) 임형수(林亨秀),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등과 사귀었으며, 58세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할 때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만났다.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받은 편지는 100여 통이 넘지만 기대승은 불과 세 차례 서울에서 이황을 만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황은 문하에 출입한 제자 중에서 도산서당의 강석에서 직접 배운 영남의 많은 학자들을 제치고 기대승을 가장 높이 인정하였다. 그래서 이황이 벼슬을 그만두고 조정을 떠날 때 선조(宣祖)가 조정 신료들 중 누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인지 묻자, 이황은 “기대승은 글을 많이 보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할 만합니다.”라 하여 오직 기대승을 추천하였으니, 기대승을 내심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황과 기대승은 저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辯)을 펼쳤다. 이황은 기대승과의 토론을 거쳐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이를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이를 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라고 하는 소위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여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와 개념을 더욱 분명히 분석, 정의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주자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향후 학계에 오랜 세월 토론할 큰 쟁점을 던져놓은 것으로 주자학 역사에 대서특서할 큰 학문적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도산서당의 편액.

 

 


▲퇴계가 말년에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

 

 

#도산서원에서의 만년

 

 

꽃은 바위 벼랑에 피고 봄 고요한데         花發巖崖春寂寂(화발암애춘적적)
새는 시냇가 나무에 울고 물은 잔잔해라   鳥鳴澗樹水潺潺(조명간수수잔잔)
우연히 산 뒤로부터 제자들을 데리고서    偶從山後攜童冠(우종산후휴동관)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르러 서당을 보노라   閒到山前問考槃(한도산전문고반)

 

 

계상(溪上)의 집에서 산을 넘어 도산서당에 이르러 읊은 시로 이황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회갑 해인 1561년에 지은 시로 학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노학자의 정신세계가 담담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이 이황으로서는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던 시절이었다.
 

신유년(1561) 4월 15일에 선생이 조카와 손자 안도(安道) 및 덕홍(德弘)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濯纓潭)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반타석(盤陀石)에 배를 정박했다가 역탄(櫟灘)에 이르러 닻줄을 풀고 배에서 내렸다.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으셨다.

 

제자인 이덕홍이 기록한 이황의 풍류이다. 이 당시 이황은 회갑이었다.
 

이후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출사와 사직, 상경과 귀향을 반복해야 했던 이황은 노병(老病)을 이유로 누차 간곡히 사임한 끝에 1569년 3월에야 69세의 나이로 우찬성(右贊成)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해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70세, 1570년 12월 8일이었다. 1569년 3월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이듬해 12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꿈에도 그리던 도산서원에서 안돈한 지 2년이 채 못 되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듣자 임금인 선조는 3일간 정무를 보지 않음으로써 애도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순(文純)의 시호를 받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추앙을 받고 있다.
 

■퇴계집(退溪集)


▲‘퇴계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퇴계집』은 도합 63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중에서 이황의 학문과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은 편지들이니, 어떤 것은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 되고 어떤 것은 깊은 철학 논문이 된다. 이 중에서도 기대승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특히 중요함은 말할 나위 없다. 이밖에 68세 때 어린 선조 임금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이황의 저술로 반드시 손꼽히며, 「천명도설서(天命圖說)」, 「심경후론(心經後論)」, 「전습록변(傳習錄辨)」 등도 이황의 저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도연명과 두보, 주희의 시를 배웠다고 하는 이황의 시도 매우 격조와 문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계선생문집’ 속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이황의 인품은 대개 근엄하고 신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편지들을 보면 매우 자상하고 진솔하며 인정이 많고, 의외로 활달한 면모도 보인다. 현재 퇴계학연구원에서 이황의 저술들을 샅샅이 모아 정리하는 정본(定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정본에는『퇴계집』을 간행할 때 빠진 글들도 다 수록하는데, 학문적인 가치는 크지 않을지 몰라도 이황의 일상과 인품을 읽을 수 있는, 오늘날 우리 독자들이 읽기에는 오히려 더 재미있는 글들이 많다. 끝으로 그 중에서 이황의 해학을 엿볼 수 있는 짧은 편지 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손자 안도(安道)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두고 겸사로 한 농담이다.

 

 

“안도 녀석이 과거에 급제했고 게다가 혹 높은 등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하니, 쑥대 그물에 범이 잡힌 격이요 맹인이 곧장 문을 찾아 들어오는 격이라 할 만하군. 마음이 기쁘면서도 괴이쩍다.”

 

 

 

글쓴이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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